<한자의 역설>을 시작하는 물음, “왜 한자를 이해해야 하는가”
저자 김근은 중국의 광대한 대륙과 4000년에 이르는 역사뿐만 아니라 언어와 관련된 다양한 이론의 영역들을 유연하게 횡단하며 그 속에 내재되어 있는 혹은 숨겨져 있는 ‘한자’의 사회·문화적 가치와 의미를 꼼꼼하게 찾아내 자세하게 설명해줍니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행보를 시작하게 하는 것은 (우리는) “왜 한자를 이해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입니다.
중국의 급속한 경제 발전과 가능성에 기대어 급격히 늘어난 중국어에 대한 수요와 자격증의 하나로 취급되는 ‘한자능력시험’의 관심 증가, 더욱이 한자문화권 안에 속해 있는 우리나라의 상황을 고려한다면, 이 물음은 우리 사회에 있어서도 매우 의미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유도 모른 채 한자를 외우기 시작하는 어린 아이들에게, 중고등학교 교과목에 왜 한문이 포함됐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청소년들에게, 취직과 승진 등을 목적으로 중국어와 씨름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한자의 역설>은 질문합니다. “왜 한자를 이해해야 하는가.”
한자는 중국을 이렇게 지배했다
<한자의 역설>은 ‘언어와 이데올로기의 관계’라는 맥락에서 한자가 중국 역사에 미친 영향과 중국을 지배한 과정, 그리고 이를 가능하게 한 한자의 특징들을 구체적으로 분석하여 드러내줍니다. 그에 따르면 중국은 광활한 대륙을 통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효과적인 지배의 틀이 필요했으며, 이는 곧 한자의 형성과 연관되어 있는 관념적인 틀로서의 이치(행동 규범으로 작용하는 상징적 원리)에 대한 강조에 다름 아닙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한자는 지배이데올로기의 생성과 적용에 있어서 무엇보다 유용한 도구로 사용됐습니다.
한자는 우리말과 달리 글자 하나하나가 의미를 지니고 있는 표의문자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표의기능은 한자의 구성에 이미지가 개입돼 있기 때문에 생겨납니다. "아이콘이나 로고가 특별한 독해 방법 없이도 지시하는 의미를 스스로 말해주고 있는 것처럼", 이미지로서의 "한자 역시 스스로 그 의미를 표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효도 효(孝)자는 그 자형에 있어서 자식(子)이 노부모(老)를 업고 있는 시각적 이미지를 통해 효도라는 의미를 드러냅니다.
이처럼 한자가 전달하는 이미지의 상징적 의미들은 이를 사용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그것이 담고 있는 사물의 가치와 질서체계를 받아들이게 합니다. 다시 말해, “상징적 모양의 효(孝)자의 자형은 이 글자를 보는 사람들에게, 효도하려면 노부모를 업고 다녀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을 불러일으키며”, 이와 동시에 부모와 자식 사이의 상하관계를 규정하는 위계질서를 드러내줍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문자언어가 우리에게 권력의 담론을 내재화시키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형이라는 시각적 상징은 너무나 형상적이어서 (효에 대한) 이러한 개념이 정당한 것인지, 또는 효를 이렇게 실천하라고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의심을 품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물의 의미를 이미지로써 규정해주는 한자의 기능은 이데올로기를 당연한 이치로 여기도록 유포하는 데 매우 유리”하게 됩니다.
하지만 상징체계로서의 모든 언어가 개별적인 실제 세계의 모습들을 모두 담아낼 수 없는 것처럼, 한자 또한 그 내부에 포섭되지 않은 잉여 혹은 모순을 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물들 간의 공통적 특징을 추상화하는 언어는 본질적으로 개개의 특징적 양상들을 필연적으로 배제시킬 수밖에 없는데, 예를 들어 ‘사람’이라는 말은 나와 너의 차이를 지우고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특성만을 지시합니다. 그러므로 언어를 포함한 모든 상징체계는 그 자체로 불가피한 역설에 직면하게 되며, 이러한 맥락에서 지배이데올로기는 이에 대항하는 잉여와 모순이라는 위험 요소를 항상 내재하게 됩니다. 이러한 잉여가 해결되지 않은 채 축적되어 세력화되면 역사의 흐름을 뒤바꾸는 혁명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 위기 속에서 중국인들은 ‘중용’이라는 지혜를 통해 역사의 극단으로 치닫는 상황을 피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한자는 그것의 해석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가능성에 의해 잉여와 모순을 내부로 포섭하고, 큰 저항 없이 지배 이데올로기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합니다. 그리고 이점이 바로 저자가 강조하는 ‘한자의 역설’, 즉 이데올로기의 상징체계 밖으로 내몰린 잉여와 모순적 존재들에게, 가능성으로 남겨진 의미들을 통해 그 체제 안으로 진입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고, 이를 통해 현재의 체제를 인정하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한자의 역설>은 독자를 이렇게 안내한다
이 책에서 저자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익숙한 한자의 지식으로부터 출발, 역사적인 맥락에서 그 의미들을 구체화해 보여줍니다. 그리고 다양한 예를 통해 한자에 대한 사전 지식이 많지 않은 이들에게도 쉽게 읽힐 수 있도록 내용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책을 읽는 동안 독자는 학창시절에 보았던 낯익은 용어들, 즉 한자의 형성원리인 '육서'나 서체의 종류 등을 발견하는가 하면 그동안 미처 알지 못했던 지식을 만나는 참된 독서의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또한 우리가 익숙하게 사용하는 한자들의 기원과 의미의 그물망으로 얽혀 있는 다양한 한자들에 대한 설명은 한자에 대한 거부감을 없애줍니다. 이렇듯 <한자의 역설>은 독자에게 언어(한자)와 이데올로기의 관계라는 깊이 있는 이론적 이해와 함께 '한자의 재미'라는 덤까지 가져다줍니다.
-컨텐츠팀 에디터 현선(anejsgkrp@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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