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물이란


 올린이 : 터돌이  (지준규  )    96/07/08 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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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물의 이해

 풍물을 제대로 이해하고자 한다면 많은 부분을 같이(포괄적으로) 다루어야 된다.

왜냐하면, 풍물이라는 것이 우리 민중들의 생활,  심성(민족성)을 반영하고 여러가지 다른 요

소를 포함(극적요소, 춤, 노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풍물은  우리 겨레의 삶과 밀

접한 관계를 맺고 있고, 삶 그 자체였다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음악은 인간의 문화와 역사의 하나로 태어난다. 이  둘과 관계되지 않는 음악은 하나

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역사와 문화의  하나로 우리음악을 파악하려고 하지 않는 경

향이 있다. 우리는 음 현상으로만 이를 파악하려는 습성을 지니고 있다. 이제까지  모든 음악

을 음악형성 과정의 최종단계인 연주행위에 의해서만 이해하려고 배워 왔기 때문이다."

                                     - 우리음악, 그 맛과 소리깔 (신 대철 저)

 풍물도 우리음악의 범주(악기의 연주 측면만을 바라볼  때)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면 우리

의 문화와 역사를 바르게 보지 않고서는 풍물을 바르게 볼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풍물(우리음악)의 참 맛과 길을 회복함은 단순한 풍물(우리음악)애호의 문제가 아니다. 여기

에는 우리의 역사와 문화에 바탕한 잊었던 건전한  민족정신 문제가 담겨져 있다. 잊었던 민

족정신을 풍물(우리음악)을 통해 회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풍물을 이해한다라고 한다면 우리민족의 문화와 역사와 동, 서양의 문화적 차이점

등을 두루 이해해야 조금은 보고, 듣고,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미약하나마 이 자료가 여러분들에게 풍물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더욱 촉발시키는 조그마한

불씨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다룬다.

 

하나. 명  칭

   농 악

 1870년대까지 판소리 춘향가에는 '두레굿'이라 쓰였는데, 일본제국주의의 농업 수탈정책의 하

나인 농업장려운동으로 원각사의  협률사라는 단체에서  '농악(農樂)'이라 부르기 시작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역사적인 기록은 일제식민지시대에 대부분 소실되고 변조되었다.)

 농악이 글로 처음 나타난 것은 1936년 총독부에서 펴낸 '부락제(部落祭)'라는 책에서였다. 따

라서 농악이라는 말은 일제시대 때 일본학자들에 의해 생긴 말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농악이

란 말을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농민(농사꾼)의 음악'으로 여겨질 수  있다. 원래 풍물굿이 농

경사회에서 나온 것은 사실이지만 농민들 스스로 농악이라고 불렀던 적은  없었고 일제의 민

족 말살정책의 하나로써 일본의 탈놀이 능악(能樂)의  발음인 '노가꾸'를 본떠서 농악이란 말

을 만든 것으로 보인다.

 일본제국주의는 우리의 민속신앙을 말살(민족정기 말살정책)하고 농업장려의 목적에 한해서

만 풍물굿을 허용했다. '농악'이란 이름으로 신청을 해야만 굿판을 열 수 있었기 때문에 굿하

는 단체나 마을들이 농악이라는 이름으로 공연신청을 한 데서  일반화되다가, 8.15 해방 이후

많은 학자들이 국악이론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농악이라 부르게 되었다.

 풍물은 총체적인(종합적이고 대동굿적) 성격을  갖고 있는데 농악이라는 말은  농민의 음악,

즉 장단이나 소리만을 나타내는 단순히 악기를  연주하는 것만으로 한정시켜 버린다. 풍물이

음악적인 요소의 비중이 큰 것은 사실이지만, 풍물굿이 가지고 있는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뜻은 놀이, 춤, 재담, 노래, 연극 등이 나뉘어지지 않고  같은 마당에서 함께 어우러진다는 것

이다. 또 현재 사회에서도 가능할 수 있어야 하며, 이러한 뜻에서 좀더 적극적인 쓰임말이 필

요하다.

 풍물굿이 본래 농경사회와 함께 하면서 농경사회의 생활과 노동의  율동으로 만들어진 것이

지만, 오늘날 서로다른 환경이나 조건 속에 놓여 있는 여러 삶의 터(농촌, 도시, 학교, 노동현

장, 어촌 등)에서도 공동체문화 형성에 필요한 매개체로 쓰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쓰임

말 자체가 가지는 한계점을 이겨 낼 필요가 있다.

 

   사물놀이

 근래에는 사물놀이란 말이 유행하고 있는데 이는 1970년대 말에 "사물놀이패"가 만들어지고

나서 많이 쓰이게 된 용어이다. 사물이란  불교에서의 사물(범종, 운판, 법고, 목어)에서 나왔

다고 보는 시각도 있는데, 풍물굿에 있어서 사물이란 쇠, 징, 장고, 북의 4가지 악기를 말하며

사물놀이란 풍물을 가리킨 다기보다는 고도로 무대화된 타악기의 연주형태라 할 수 있다. 따

라서 풍물을 지칭하는 용어가 아니라 풍물을 음악적으로 발전시킨 한 형태인 것이다.

 지금 우리는 '사물놀이'라는 말이 마치 우리나라의  전통예술 가운데 꽹과리, 징, 장구,  북을

가지고 뭔가 예술적인 행위를 하는 어떠한 갈래를  일컫는 보통명사로 쓰고 있으나, 사실 사

물놀이는 1978년에 생긴 한국전통타악연주 단체(김덕수패 사물놀이)에서 자신들 스스로 붙인

단체의 이름이었다. 처음에는 보통명사가 아닌 고유명사였던 셈이다. (실제, 70년대 말 김덕수

풍물패가 민속학자 "심우성"씨를 찾아와 자신의 풍물을 어떻게  명칭해야하는가? 에 대한 질

문에 대해, 4개의 물건을 가지고 연행을 하니 사물놀이가  적절하겠다는 조언을 주었고, 이후

이것이 고유명사화 되었슴 --- 심우성씨의 TV대담)

 그런데 지금은 마치 '사물놀이'가 '풍물놀이'인 양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자주  보인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사물놀이가 우리 가락을 쉽게 접할 수 있게 한 점이나, 각 지역에 흩어져 있던 고도의 기예

를 발전시킨다는 장점도 있으나 풍물이 가지는 총체적이고  대동놀이적인 성격을 소멸시키고

무대화시킴으로서 연희자와 관객을 분리시켜 개인주의적인  문화유통구조를 심화시키는 문제

점이 있다.

 원래 풍물은 가만히 앉아서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으로 참여하여 연희자와 관객의 구

분 없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것이며 또 그래야만 재대로 신명이 나는 풍물판이 형성되는 것이

다. 때문에 앞으로 우리는 '풍물놀이'와 '사물놀이'를 명확히 구분해야 할 것이다 .

 풍물은 농사일을 하던 우리네 조상들이 쇠, 징, 장고, 북  4가지 악기를 중심으로 가락을 치

며 춤과 함께 노래와 재담, 사설, 재주, 등과 연극적 요소를 담당하는 잡색 등을 포괄하는 총

체적인 연희 형태로 발전시킨 것을 말한다. 연희란 연극과 놀이를 포함하는 종합적인 의미이

며 연극, 놀이, 음악,  무용 등으로 구분할  수 있는 요소들이  어우러져 이루어지는 것이다.   

옛부터 정초에는 동제나 지신밟기를 하며 한해를 시작하였고  농번기에는 일터에서 두레굿을

치었고, 추석을 맞이하여서는 풍물이 전국 방방곳곳을 메아리 치는 가운데 그해의 풍년을 축

복하였고, 싸움에 임하여서는 싸움굿으로 줄당기기, 차전놀이 등 대동놀이를 이끌어 대동판을

형성케 하는 역할들을 수행하였다. 이처럼 풍물은 우리의 생활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발전

해 왔다.

 그러므로 오늘날에 서구적 예술 구분 방식에 따라 풍물을 몇  가지 타악기로 구성된 음악의

한 장르로 구분해 버리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풍물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데서 오는 오류이

다.

   그 외의 명칭

   다른 명칭으로는, '매구' '풍장' '두레' '걸립' 등으로 부르고 세분화해서

 ┌  연주예능으로 보는 경우는 '굿친다' '금고(金鼓)친다' '매구친다' '쇠친다'라 하고

 ├  풍물기(器)를 통해 말할 때는 '굿물' '풍물'이라 부르고 있다. 

 ├  종교적 예능으로 보는 경우에는 '굿' '매굿' '지신(地神)밟기' '마당밟기'라 하며,

 ├  노동예능으로 볼 때는 '두레'라 하고,

 ├  풍악(風樂)이나 풍류(風流)로 해석하는 경우에는 '풍장'이라 표현하기도 한다.

 └ 풍물의  악기가 금속성악기(꽹과리,  징)와  고(鼓:가죽)악기(북, 소고,  장구)로 구성되기     

  때문에   풍물을 '금고(金鼓)'라   하기도 하고,   일부지방에서는 군악(軍樂)으로  보아  '군       

고(軍鼓)'라 일컫기도 한다. 이와 같이 풍물은 그 명칭이 다양한 종합적 예능이다.

 ※ 풍장 : 농사일에 많이 쓰이는 말로  김매기할 때 이루어지는 풍물놀이를 가르킨다. 특히 

           만두레(벼농사는 김매기를 보통 세 번 하는데  그 가운데 마지막에 하는 것을 말 

           함)가 끝나는 날 농사가 제일 잘 된 집  머슴을 소등에 태워 위로하며 노는 것을 

           농장원, 질꼬냉이라고 한다.

 ※ 두레 : 원래는  우리나라 고유의 마을단위 일공동체를  가리키는 말이며, 특히 김매기를   

            위해서 만들어 졌다. 풍물이 공동체적 놀이로서 일두레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풍물을 두레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한다.

 ※ 굿 : 모든 지방에 걸쳐  일반적으로 쓰이는 말로 '굿친다'라는 표현을 쓴다.  굿의 의미는  

        원래 '모인다'는  뜻을 갖고 있었다.  모여서 공동체 안의  모든 일을 의논하고  풀어   

       가며, 공동체적  바람을 집단적으로  빌며 집단적  신명으로 끌어  올려 새로운  삶의    

       결의를 다지는  일련의 과정을  담아 내는  말이었으나, 오늘날에는 무속에서의  신앙   

       적 뜻만을 가리키는 흐름이 있다. 

 ※ 매구, 매굿, 매귀(埋鬼) : 땅 밑에 있는 나쁜  귀신이 나오지 못하도록 묻고 밟는다는 뜻 

                             으로 보통 섣달 그믐날 밤에 하는 풍물놀이를 매굿이라 한다.

              주로 경상도 지방에서 풍물을 일컫거나 꽹과리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 풍물, 풍물굿 : 주로 경기,  충청도 지방에서 쓰이는 말로 모내기할 때  간단한 편성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말하기도 하며  신에게 소원을  푼다는 뜻이나,  농사의   

                  풍년을 바란다는  뜻으로도 쓰인다.  80년대에 들어와서 대학가와  문화모  

                  임들이 농악이란  말 대신에 풍물  또는 풍물굿이라는  이름을 많이 쓰게    

                  되었다.

  최근에 민속학자 조동일씨가 내놓은 자료에는 전라도 지방의 '농락(農樂)'이라는 명칭이 있

고 '농악'이라는 말이 여기에서 연유가 되지 않았나 하는 설이 있다. 그러나 글쓴이의 입장에

서는 앞서 조금 다뤘지만 농악이라는 말 자체가 가지고 있는  한계점으로 인하여 농악이라는

말을 쓰기 보다는 중부지역에서 주로 사용되었고 직접적인 노동과 관계가  있으며 가장 널리

쓰이는 풍물(풍물굿)이라는 용어를 쓰기로 한다.

 

두울. 풍물의 역사

 풍물은 조선 후기 마을공동체에서 힘든 노동을 즐겁고 활기찬 노동으로 전환하기 위하여 놀

이와 노동이 결합된 두레굿으로 형성되었으며 마을 전체의 크고 작은  일들과 결합하면서 마

을굿으로 확대 발전되었다.--- 실례로, 모판을 내고 씨를 뿌릴때 20명이 논에 모를 낼때 7~8

명이 논뚜렁에서 풍물장단에 맞춰 농요가락에 맞춰  노래를 부르는데, 현대의 경제학적인 측

면에서보면 27~8명이 함께 모를 내면 효용의 가치가 높아진다.  이것은 자본중심의 가치이다.

그러나 사람중심의 가치를 보면, 20명이 모를 내고 옆에서 노는 꼴을 보면, 이미 그것은 힘든

농사일이 아니라 함께 어울려 노는 놀이이다.

지금까지 전승되어온 농요로는 "에루아 에루얼싸"가 있다. 앞소리를 논두렁에서  치고 그장단

에 맞춰 뒷소리를 모내는 사람들이 받는것, 이때는  이미 힘든 노동을 즐거운 놀이로 전환하

는  조상들의 지혜가 엿보인다. -- (이러한 형태들을 두레패적 풍물이라고 한다) 이후 이러한

마을 단위의 풍물을 바탕으로 하여 마을 공동기금 조성을 위한  걸립굿이 생겨나면서 전문적

인 풍물패가 만들어지고, 사회경제학적으로는  조선후기에 양반제도의 해체과정  (조선후기엔

양반계급이 70%이상)과 상공업의 발전에 의해 지방장시를 기반으로 한 전문 예인 집단인 사

당패가 출현하면서 전문적인 연희굿이 발전하게 된다.(이러한 형태를 사당패적 풍물이라고 한

다.) 이 연희굿은 노동 과정에 나온 풍물이 전문적 문화예술로까지 발전한 것으로  풍물의 가

능성을 더욱 넓혔고 마을굿과 유기적으로 결합하면서 풍물의 전성기를 이루게 되었다.

 이렇게 두레를 기반으로 발전해 온  풍물은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그  발전이 단절되고

왜곡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두레 공동체에 대한 철저한  탄압과 함께 민족적인 유대감과

일체감을 형성하는 한민족의 뿌리깊은 문화인  풍물도 "낭비적인 것, 미신적인 것"이라  하여

철저히 탄압을 받았다. 농민에 의해 자발적으로 발전되어  온 공동 노동 조직인 두레는 부역

에 의해 강제화 되고 품팔이에 의해 개별화되었으며 풍물은 일과 놀이의 생산적 결합이 아니

라 강제노동의 능률을 높이기 위하여 사용되었으며 전문연희패는  일제의 수탈정책에 이용되

면서 마을굿과의 유기적 관계 속에서 담보해 온 민중지향성을 상실하게 된다. 해방후 우리의

역사는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채 서구의 개인주의적인 문화가  밀려오는 과정에서 우

리 민중들이 향유하는 문화는 퇴폐적이고 향락적인 자본주의 문화의 영향으로 비생산적인 소

비문화로 자리잡게 되었다.

 70년대 초에는 새마을 운동으로 민족적인 전통을 무시한 서구적  합리주의의 영향으로 민족

적인 것을 미신, 낭비적인 것이라 하여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고 있던 당산, 악기 등을 없애버

렸던 것이다. 이런 흐름 속에서 전통  문화 복원정책은 창조적이고 생명력있는 전통민중문화

를 형식적으로만 복원시킴으로써 삶 속에서 변화,  발전하는 주체적인 문화가 아니라 박제화

되고 특정인만이 하는 특별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따라서  이러한 풍물은 민중의 건강한

문화로서가 아니라 마스게임화되고 경연 대회 출연용 -- 박정권시대 80년도 "국풍81" 등--으

로 둔갑하는 풍물로 자리잡아 왔던 것이다. 반면에  70년말부터 우리의 전통 문화에 대한 인

식이 높아지고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기 시작하고  탈춤을 중심으로 하여 풍물, 민요 등이

광범위하게 확산되는 과정을 거치게 되었으며 이러한 쟝르중에서 풍물이 가장 많이 보급되었

고, 특히 87년 노동자 대투쟁이후 노동자들이 풍물을 가장 많이 찾게 된 과정이기도 하다. 따

라서 새로이 광범위하게 보급되는 풍물은 과거의 지나간 문화로서가 아니라 살아있는 현재의

문화로 재창조하여 발전시켜야 할 것이다.

 

   풍물의 기원(발생)

 풍물의 기원을 찾으려면 저 멀리 원시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짐승을 잡거나 농사를 지은

후 하늘에 감사를 지내고 더욱 많은 생산을  기원하는 제천의식에서부터 찾을 수 있다. 그러

나 그때 행해지던 것을 풍물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물론 원시적인 악기나 장단은  이때부터

만들어졌을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풍물은 장단이나 악기만으로는 해석할 수 없기 때

문이다.

 

 [[ 馬韓常以五月 下種訖 祭鬼神 軍娶歌舞飮酒  晝夜無休 其舞數十人 俱起相隨踏地低昻 手足  

    相應 節奏似鐸舞 十月農功畢 亦復如之 ]]    -- {삼국지} 위지 동이전(魏志 東夷傳)

 (( 마한(馬韓)에서는 5월에 파종이 끝나면 항상 귀신에게 제(祭)를  올렸다. 마을사람들은 무 

    리를 지어 주야로 쉬지 않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술과 음식을 먹었다. 그 춤은 여  

    러명이 한 줄을 이루어 몸을 구부리기도 하고 허리를 펴기도  하며 손과 발을 서로 맞추 

    는 것이었다. 절주(節酒)는 마치 중국의 탁무(鐸舞)와 비슷하였다.  10월에 농사가 끝나도 

    그와 같이 하였다. ))

 - '제귀신(祭鬼神)'이라 함은 무당들이 사제(司祭)한  동제굿과 마당밟기(地神밟기)를 연상케

하고, '군취가무(群聚歌舞)'라 함은 신성한  놀이장에서의 신명난 춤을  말한다. '탁무(鐸舞)'라

함은 지금의 풍물형태를 가리킨 것이  아닌가 보아지는데, 그 형식  즉 제천의식(祭天儀式)은

어떠한 내용이었으며, 예능적 형식은 어떠한 모양을 하였을까 하는 점이 풍물의 유래를 규정

지어 주리라 보여진다.

 

 원시시대의 제천의식 또는 집단적 바람을 비는 제의형태는 종교적  의식을 주재하고 대행해

줄 무당(샤만)이 나타나기 이전이므로 집단적 신명을 통해 신과 만나고 기원하는 형태였으며,

풍물굿의 원시적 형태로서의 집단춤과 쉽게 소리를 낼  수 있었던 타악기를 썼을 것이다. 이

것이 조금씩 나아지면서 오늘날의 틀을 갖춘 것은 조선시대 이후라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풍물굿에서의 악기와 연희형태 가운데 불교에서  들어온 것이 많은데, 이런 악기

와 연희 형태가 기층민중과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불교가 탄압을 받았던 조선시대이며, 풍물

굿이 농촌의 두레공동체와 함께 커 온 것으로 볼 때 두레의 생산과정과 궤를 같이 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즉 함께 일하는 것이 필요하게 된 것은 이앙법(모내기)이 들어온 조선시대

이후로 추측할 수 있다.

 조선 후기에 들어 농업에 있어서 생산력이 발전되고 수전농법이 보편화 되면서 짧은 기간동

안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따라서 개별적인  노동으로는 생산력 발전을 따라갈

수 없었으므로 이제까지 행하여지던 공동 노동을 더욱  발전시키고 재편하여 '두레'라는 공동

노동 조직을 만들어 농사를 짓게 되었다. 마을의 청장년 남자들이 의무적으로 가입하여 구성

된 두레는 마을의 전체 경지를 모두 하나의 경영지로 간주하여  모내기부터 마지막 김매기까

지의 작업을 수행하였다.

 풍물은 바로 이 공동 노동의 효율적 운영과 노동능률의 재고를  위하여 그리고 힘든 노동을

즐겁고 활기찬 노동으로 전환시키기 위하여  당시까지 전하여 오던 원시적  풍물을 재편하고

발전시켜 형성되었다. 이러한 형태가 바로 '두레굿'이며  모든 두레는 풍물을 쳤고 모든 두레

의 구성원은 바로 풍물패이기도  하였다. 또한 두레가 존재한  지역과 풍물의 모습이 보이는

지역이 해주 원산 이남 (논농사 한계지역)으로 일치하는 것도 풍물의 발생이 두레굿에서부터

라는 증거이기도 하다. 아직도 일부 지역에서는 풍물과 두레를 구별하지 않고 두레라 부르고

있다. 그러므로 풍물의 참된 모습은 노동과 결합된 풍물(두레굿)에 있으며  두레굿이 먼저 만

들어지면서 마을사람 모두가 참가하는 제사인 동제를 재편하여  마을굿을 이끌어내 두레굿과

마을굿이라는 마을단위의 풍물굿들을 성립시켰다. 이러한  의미에서 두레굿은 원시적 풍물의

진정한 의미의 풍물로 발전된 형태이며 지금의 풍물은 두레굿에서 그 기원을 찾을수 있다.

 

▶ 학자들 사이에 풍물굿의 기원을 풀이한 것으로는  풍농안택기원설, 군악설, 불교관계설 등

이 있는데, 이들은 풍물굿의 기원을 풀이한  것이라기보다는 풍물굿이 오늘날의 모습을 갖기

까지의 과정을 풀이한 것으로 의미가 있다.

 ☞ 풍농안택기원설

 농경사회에 있어서 집단적인 바람(기원)은 당연히 농사가  잘되고 마을에 탈이 없기를 바라

는 것으로, 이는 집단적 신명을 통해서 이루어졌고, 그것을 위해  쓰였던 음악과 춤을 풍물굿

의 원시적 형태로 보는 것이다.

 ☞ 불교관계설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유교에 밀려 불교가 탄압을 받게 되자 모든 절의 경제적 기반이

어려워졌다. 사찰의 재원을 확보하기 위하여  승려들이 자구책으로 불교음악이나 의식춤에서

나오는 연희형태를 가지고 마을에 내려와 걸립을 하게 되었다. 이런 일들이 계속되면서 불교

음악과 의식춤에서의 악기, 장단, 연희형태들 가운데 민중의  미의식에 알맞는 것들을 풍물굿

에 끌어들여 썼으리라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소고를 법고(버꾸)라고  한다든지, 고깔을 쓰고

놀이를 한다든지, 바라를 악기로 쓰는 것 등은 불교의 영향을 잘 말해 주는 것이다.

 ☞ 군악설

 풍물이 군사적 내용을 갖추게 된 시기는 멀리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볼 수 있다. 고구

려(高句麗)에는 '고적(鼓笛)'이 있어서 군대에서 신호로 쓸 뿐만 아니라, '고각(鼓角)'의 소리를

들으면 일제히 나가서 돌격하도록 했다는 기록이나, 고각을 불고 기치(旗幟)를  들게 하니 모

든 군사가 북치고 고함을 지르며 일제히 진군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삼국사기)}에 있다. 그

리고 백제의 '요고(腰鼓)'는 각(角)과 함께 군대의 신호용으로 같이 사용한 것이다.

 전통시대에 변방을 지키거나 기타 군대일을 하는 사람들은 모두 농민들이었으며, 그들은 요

즈음의 예비군과 같은 성격을 지녔다. 풍물굿패의  옷차림이나 지휘체계 등에는 군대의 것들

이 많이 보이는데, 이를 통해 농민들이 놀이 속에서 군악의 체계를 썼음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풍물굿이 흐트러짐 없는 짜임과 힘을 가지는 것도 이러한 영향에 의한 것으로 본다.

(예: 진풀이 판굿, 오방진 등 군사용어, 발림을 할 때 모든 치배들이 발을 맞추는 것)

 

   풍물의 발전 과정

▶ 두레굿

 두레굿은 직접 노동을 하는 사람들이 노동 과정 속에서 노동과  놀이를 결합시켜 행하는 풍

물의 형태를 말한다. 전에는 마을단위의 공동노동조직인  두레가 이를 담당하였는데 이 두레

굿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두레의 출역이 있는 날에는 새벽에 농청이나 마을의 넓은 뜰에서 나발을 불거나 북을 쳐 두

레꾼들을 모으고 두레꾼들이 다모이면 인원을 확인하고 길굿을 치며 그날  작업할 논으로 간

다. 논에 이르면 이 두레를 상징하는 두레기(농기:농자천하지대본 또는 신농유업이라고 씀)를

꽂아 놓고 작업을 시작한다. 이때, 일꾼들 중에 몇 사람은 작업을 하지  않고 풍물을 쳐서 일

을 독려하고 흥을 내는데 이를 "풍장"또는 "두레풍장굿"이라고 한다.

 이처럼 두레굿은 모일 때부터 이동할 때, 일 하는 과정 내내, 참을 먹을 때, 일이 끝나고 헤

어지기 전까지 하던 것이며  가락과 세련되지 않은 춤, 그리고 농요가 주내용을 이루고 있었

던 것이다.

 두레굿 중에서 그 해의 힘든 일이 끝나는 마지막 김매기 날에 호미씻이라고 하여 커다란 풍

물판이 벌어지는데 그 해 가장 농사일을 열심히 한 사람을 뽑아  소에 태우고 마을을 돌면서

걸판지게 노는데 이 때에는 여러가지 전형적인  인물을 상징하는 잡색(대포수,조리중,각시 할

미등)들도 나와 흥을 돋군다. 호미씻이는 대개 음력으로 7월 15일인 백중날 열리기 때문에 백

중 놀이라고도 하고 장원두레꾼을 뽑는다 하여 장원질이라고도 한다.

 이와같이 두레꾼들이 주체가 되어 만드는  풍물판중 두레풍장굿, 호미씻이는 노동과 놀이가

결합된 이상적인 풍물판으로 도시생활 중심의 오늘날 우리생활 속에서 현실에 맞게 변형되어

다시 부활되어야 할 가장 중요한 풍물판이다.

 

 

▶ 마을굿

 마을굿은 두레굿이 마을 전체로 확대된  것이며 노동 과정 외부에서 노동과  관련을 가지며

이루어지는 풍물이다. 마을굿은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풍물의 형태로 당굿, 당산제(동제)가

중심이다. 당산은 마을의 수호신을 모신 곳으로 대개 입구나 중심적인 위치에 자리하고 있는

마을 귀퉁이에 있다. 일반적으로 음력 정초에 지내는 당산굿은 우선 마을회의를 통하여 날짜

를 정하고 제주를 뽑은 다음  제수를 장만한다. 제를 지내는  날 마을 사람들은 마을의 넓은

장소에 모여 길굿을 치며 당산에 가서 제를 지내고 제를 다 지낸 다음 당산 앞마당에서 판굿

(공연)을 한바탕 벌이고 마을로 들러 온다.  이때부터 마을의 각 장소를 돌면서  제를 지내는

데 이를 지신밟기라 한다. 지신밟기는 농청이나 마을 회관,  공동우물, 마을입구(문굿)등 공동

체 생활이 이루어지는 곳을 먼저 하고 각  집을 돌면서 지신밟기를 계속한다. 이 지신밟기는

당산굿과 독립된 마을굿의 한 형태이기도 하다.

 지신밟기는 수일 동안 계속되는데 앞치배 뒷치배  모두 참가하며, 당산굿-샘굿-집돌이-판굿

으로 구성된다. 지신밟기가 발전한 고장에서는 집돌이가  끝나는 날부터 몇일을 두고 판굿과

파제를 벌이는데 이때의 판굿은 풍물패가 마을 사람을 대상으로 하여  수행하는 공연인 것이

다. 지신밟기가 끝나는 정월 대보름에는 줄다리기, 고싸움, 차전놀이, 쇠머리대기, 탈놀음 등의

대동놀이를 벌이기도 하였다.

 마을굿은 당산굿과 지신밟기 외에도 세시풍속과 결합되어 커다란 풍물판이기도 하다.

 

▶ 걸립굿

 걸립굿은 마을굿 속의 지신밟기가 공동기금의 모금을 목적으로 발전한 형태를 말한다. 마을

굿에서 발전해 온 공연으로서의 판굿이 걸립의 목적에 맞게 예술적 측면이 더욱 발전하게 되

고, 마을이 천재지변을 당했을 때는 마을에서 기능이 뛰어난 소수의 인원으로 피해를 입지않

은 먼 곳의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지신밟기나 판굿을 벌여서 기금을  건립하여 돌아오기도 하

였다. 또는 마을 단위의 큰 공사나 걸립기금을 마련하기 위해서도 소수의 정예화된 사람들로

구성하여 각지를 돌기도 하였다.  이런 걸립굿의 발전은 마을마다  다르게 발전해 온 풍물을

많이 교류하게 만들었으며 비나리나 고사소리의 발전을 가져오기도 하였다. 특히 마을굿보다

판굿이 더욱 다양해지고 세련되어 가는 과정이었다.

 

▶ 연희굿

 연희굿은 걸립굿에서 보다 발전한 형태이며 조선후기 생산력의 발전에  의해 전문 연희패가

생기면서 장시를 기반으로 하여 독자적인 공연 형태로 발전한 것을 말한다. 이런 전문연희패

의 발생은 두레굿이나 마을굿 속에 담겨있는 소박한 예술성을 고도로  발전시켰을 뿐만 아니

라 전문 예인들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여러가지 풍물의 형태를 창출한 것이다. 이

러한 연희굿의 발전은 예술적인 발전을 이룩한 것과 마을굿을 보다  풍성하게 살찌우는 역할

을 수행하여 마을굿과 연희굿이 같이 발전하는 즉 풍물의 전성기를 이룰 수 있게 하였다. 그

러나 연희굿은 당시 민중들의 생활과 동떨어진 예술로 발전하는 단점도 갖고 있었다.

 

   풍물의 지역적 분화(특징)

 풍물은 조선후기 임진왜란 직후인 17세기경에  발생하여 19세기에 가장 융성하였다. 지역적

으로는 두레가 보편화 되었던 중부이남 지역에는 풍농굿이  발전하고 이북지방은 무굿 (또는

탈춤)이 많이 발전하였다.

 중부이남 지역에서는 풍물이 발전하면서 마을마다, 지역마다 조금씩  다르게 분화를 하였다.

풍물이 발전하면서 지역적으로도 분화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이는  풍물이 민중이

스스로 생산, 유통, 향유하는 문화예술인 까닭이다. 마을마다 조금씩 다른 풍물을 흔히 4가지

로 구분하여 전라우도굿, 전라좌도굿, 영남매구,  웃다리풍물로 부르는데 이것은 정확한 기준

에 의하여 분류되는 것이 아니라 생활권별로 편의상 구분을 한 것으로 풍물의 기본적인 형식

이나 본질적인 의미에서 차이가 없는 것이다.

 

 ⊙ 대표적인 지역별로의 명칭을 보자. 

                 +- 웃다리풍물  ---  경기, 충청풍물굿 -+-- 경   기  : 평택 풍물

                 |                                     |             안성 풍물

 풍물굿의 판도  -+                                     +-- 충   청  : 부여 풍물

                 |                                                   웃다리풍물

                 +- 아랫다리풍물-+-- 호남풍물굿   -----+-- 호남좌도 : 필봉풍물굿

                                 |                     |             진안풍물

                                 |                     +-- 호남우도 : 이리풍물

                                 |                                   김제풍물

                                 +-- 영동풍물굿   -----+-- 강 원 도 : 홍제풍물

                                 |                     +-- 경상북도 : 금릉빗내풍물

                                 +-- 영남풍물굿   -----+-- 경상북도 : 청도차산

                                                       |              예천풍물

                                                       +-- 경상남도 : 부산아미풍물

                                                                      진주풍물

 

⊙ 지역마다의 특색

 크게 지리산쪽의 산간지방(좌도)과 평야지대(우도)로 나뉘어 지며 산간지방은  힘이 있고 소

박하게 치는 특징이 있고 평야지대는 농업이 발전한 관계로 판굿이  다양하고 가락이 화려한

면이 있다. 경상도가 북을 중요하게 사용한 반면  전라도는 장구를 많이 사용하여 풍물을 구

성하였다. 이와 같이 지역에 따라 약간씩 차이가 인정된다. 요즈음은  교통의 발달과 많은 인

구이동으로 인해 이러한 지역적 차이는 점차 사라지고 있는 경향이기  때문에 지역의 특색은

다음 기회로 미루어 둔다. 관심이 있는 분은 가까운 서점(도서관)에 가서 책을 구해보도록 권

한다. (히~)

 

   풍물굿의 수난, 단절

 풍물굿의 수난사라고 말한다면, 여러분들도  상상하듯이 대표적인 예가  일제시대일 것이다.

물론, 봉건시대에서도 풍물굿의 수난이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풍물굿이 갖고 있는 공동체적

요소 때문에(모여서 자신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지배계급의 입장에서 보기에 자신들의

존재기반을 위협하는 굿들을 항상 감시하고 지켜봤던 것이다.

 1937년 원경하(元景夏)가 호남別遺御史로 임명되어서 전라도 부안에 들렀을 때, 두레의 농기

(旗)와 풍물기(器)가 민중들의 반란시에 군용물(軍用物)이 될  수 있다고 보고 농기와 풍물기

들을 몰수한 적이 있고, 1838년 '암행어사 남태량(南泰良)'이 두레에 대하여 임금께 보고를 하

자. 임금이 "왜 농민들은 꽹과리와 징을 가지고 농사를 짓느냐?"고 묻자 우의정 송인평(宋寅

明)은 "농사를 짓고 수확을 할 때는  모두가 그 악기를 가지고 일을  한다"고 대답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영조실록(英祖實錄)}에는 농악에 대한 국왕의 물음에  암행어사는 들에

서 일을 할 때 일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꽹과리와 북을 두드리어 사기를  올려 일을 하게 한

다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또 임금이 두레의 농기(農旗)가 군대에서 사용하는  깃발과 같은 것

이냐고 묻자, 호남 암행어사는  농기와 풍물기는 군대용이  아닌 백년민속으로서 금지하기가

어렵다고 대답한 기록이 있다.

 이와 같이 단편적이나마 호남지방에는 두레와 풍물이  성행하였음을 알 수가 있고, 또 조선

왕조의 지배층이 두레와 풍물에 대하여 그렇게 호의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대시한 것이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농민이  반발해서 폭동을 일으킬 염려가 있기 때문

에 양반들은 농민들을 조종하여 세뇌하려고도 하였다.  그리하여 풍물을 하게하여 쌓였던 불

만을 발산시켜 반발을 사전에 방지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현상은 일제시대 때에는 식민지

정책의 하나로 농민들이 단합하게 되는 풍물을 금지시켜 한국인의 공동체를  해산시킨 데 목

적을 두고 벌어졌다.

 1910∼1945년의 일제 강점기에는  화폐경제가 농촌사회에 가일층  침투하고, 일제의 식민지

정책의 영향으로 변화를 겪게되었다. 그 내용으로는 두레의 쇠퇴와 소멸, 공동체적 두레의 변

질 등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다수의  두레와 풍물이 쇠퇴하고 소식민지 정책의 압력하에서

도 강인하게 존속하였다. 그 예로서 충청도  홍성군의 경우 1915년 197개의 두레가 존재하고

있었고, 그 중 풍물을 하는 곳이 164개였고, 풍물을 하지 않는 두레는 33개에 불과하였다. 그

러나 2차세계대전 전후부터는 한국의 장년들을  징용하고, 청년들을 징병했으며 곡물을 공출

케 하였고 풍물기(징, 꽹과리, 나팔) 등을 헌품하게 하였으므로 풍물을 할 수 있는 여건이 박

탈되어 버렸다. 또한 6.25동란의 여파로 계속 사회적 불안과  서구문화의 영향 그리고 농촌의

생활환경 변화로 두레가 없어져 버림으로 풍물굿이 삶과 점점 유리되었다.

 풍물굿의 단절, 왜곡은 민중정통사의 단절에 따른 민중문화의 단절, 왜곡과 그 궤를 같이 한

다. 19세기 말까지 민중문화로서의 건강성을 지녀왔고, 또  급격하게 사회경제가 변화하는 와

중에서도 다양한 변화들을 능동적으로 수용해내던  풍물굿은 세 번의 커다란  단절사를 갖게

된다.

 첫째가 일제식민통치 그 자체와 민족문화  말살정책이고, 둘째가 해방군이라는 면목하에 가

치절상되어 마구잡이로 들어왔던 GI문화(퇴페적인 미군사문화)로  시작되어 식민지문화로 고

착되어가는 과정에서고, 셋째가 산업화  시대 이후의 본격적인  자본주의 개인주의화 시대의

가치혼란 시기이다.

 일제시대와 미군정문화 유입기까지는 그래도 풍물굿의 양적 쇠퇴와 부분적 훼손이라는 점증

적인 쇠퇴과정이었는데, 풍물굿이 결정적으로 양적, 질적 몰락을  가져왔던 시기는 마지막 단

절기간이었던 산업화 시대에 들어오면서부터이다. 특히  새마을운동이 시작되는 70년대 초반

에는 전근대적인 미신이라는 명목 하에 단위마을의 정신적 지주였던 당산나무와 더불어 마을

마다 그나마 간직해오던 굿물이 깨지는 수난을 겪었고, 나아가 아예 풍물굿판을 벌이지 못하

게끔 행정적 압력을 받았다. (여기에서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예전에 한 TV프로에 '북'을 만

드시는 분이 나왔는데, 그 분에게 "가장 경기가 좋았던  때가 언제냐"고 묻는 사회자 물음에

"해방이 되고 나서였다"라고 하셨다. 각 마을마다 해방이 되서  그 기쁨을 풍물에 실어 한판

놀려고 하니까 제일중요한 북이 없더라는 것이다. 쇠는 마을마다 상쇠분들이  잘 숨겨(?)놓고

있어서인지 쇠는 있는데 북이 없으니까 마을에서 사람을 뽑아 북을  사러와서 가죽을 엮어서

채 마르지도 않은 북을 들고 갔다고 한다.)

 그리하여 지배문화 주체자들의 의도적인  계획대로 민중들의 역동적인 힘이  내재되어 있는

풍물굿 정신은 거의 쇠퇴하여 버렸고, 지금 우리들의 눈에 보이는 것은,

   첫째. 사물놀이화 --- 신명이 거세된 서양 장르적 개념으로서의 음악화이다.

   둘째. 매스게임화 --- 외국 관광객을 위한 민속촌식 보여주기 농악화한 풍물굿 뿐이다. 

 그리고 70년대 이후 대학생으로부터 탈춤부흥운동이 다시 거세게 타오르기 시작하여 풍물굿

에 대해 새롭게 눈을 돌려 발전방향을 모색하고 실천해내는 과정  중에서도 풍물굿을 예술장

르적으로 해석해내려는 시각에 의해 풍물굿 본디의 민중문화적 모습이 아직도 깨어나지 못하

고 있는 실정이다. 이 시대의 전체적 삶과 연관되고, 민중의  총체적 삶의 흐름을 꾸려나가는

관점으로 풍물굿을 발전시켜나가는 것이 아니라, 예술만의 시각,  지배문화적 분류와 틀의 관

점이 농후한 비민중적이고 서구 엘리트적인 시각으로 풍물굿을 재편집하려 하는 것들이 오히

려 풍물굿이 건강하게 발전하고 민중의 삶이 발전하는데 상당히 부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굿과 공동체에 대한 관심은 결코 잃어버린 세계에 대한 몽상적  관심이 아니라 대중들 스스

로의 문화를 자주적으로 생산케 하는 과학적 인식의  근거를 마련하느데 그 목적이 있다. 굿

과 공동체는 분리되어 있는 별개의 요소가 아니라 전체적으로 통일되어 있는 하나이며, 굿은

그 자체가 공동체성을 드러내고 공동체는 그 자체가 굿성을 드러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 굿과 관련하여 공동체에 대한 맹목적인 우호적 태도나 선입견적 접근은 객관적 태도가 아

니며 더 사려깊은 역사인식의 무기로서 공동체를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풍물굿의 생명력은 공동체적 신명의 흐름을 통한 주체적 삶의 훈련이라는 데 있다. 그 집단

신명은 괜히 신이 나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같은 계급적 울타리 속에서, 그리고 나름의 삶의

규율 속에서 일상들을 주고 받으며 어려운 삶의 조건 내에서도  희로애락의 삶들을 공유해내

는 오랜 인간적 관계 속에서 서로 동의 해내는 삶의 과정이 들어가 있는 집단신명이며, 무엇

보다도 모든 사람을 주체적 인간으로 훈련시켜내는 신명인 것이다.

 

 ⑤ 올바른 시각을 위하여

 현재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자신의 눈을  다시 한 번 들여다 보는 것이다. 여러분들이

갖고 있는 서구의 눈높이를 버리고 우리의 눈높이로 사물을 재평가해야 한다. 우리는 서양식

의식세계와 정신문화라는 색깔의 안경을 쓰고서 이를  벗으려 하지도 않는다. 그 안경색으로

우리를 보고있다. 그 빛깔로 우리를 덧칠하고 있다. 그런 세계로 우리를 이끌어 가고 있다.

 이제 우리는 늦었지만, 더 늦기  전에 이 색안경을 벗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의 의식세계와

이에 의한 정신문화, 물질문화를 바르게 바라보아야 한다.  이제까지 잘못가졌던 우리 전체에

대한 엄청난 무지와 편견의 사슬을 풀어 던져 버려야 한다. 그리고 그 위에 우리를 존중하며

우리를 찾는 의식세계를 형성하여야 한다.  물론 그  과정은 어느 누구에게도 충분히 개방적

이어야 한다.

 우리의 현재 음악문화 풍토 속에는 묘한 이분법(二分法)이 존재한다. 이 이분법은 마땅히 있

어야 할 것이지만, 도무지 비합리적이며 우리로부터 거리가 아주 먼  내용으로 되어 있다. 그

런데도 보통의 우리들은 이를 당연시하며, 때로는 이에 대한 생각과 의식조차도 가지려 하지

않는다. 이 구분법이 우리의 입장보다는 남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그러면 이와 같은 문제를 지닌 이분법은 무엇인가?

 

 ☞ 음악과 국악

 음악은 서양에서 들어온 음악을 말한다. 그러나  꼭 서양에서 수입된 것은 아닐지라도 서양  

        음악식으로 만든 모든 음악도 포함한다.

 국악은 우리의 전통음악, 즉 우리음악을 말한다. 그리고 꼭  전통적인 것은 아니더라도 여기 

        에 가깝게 만들어진 창작음악까지를 국악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이 구분법에 의해 대학에서도 음악과와 국악과가 나뉘어지고, 유명 일간지의 문화면

에서도 음악과 국악을 나누어 소개하고 있다. 책임 있는 국가기관에서도 이렇게 나누어 분류

하고 있다. 이상하게도 국악 역시 분명한 음악의 하나일진대 우리의 이러한 이분법 속에서는

음악의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 특별한 별종의 것처럼 여겨지고 있다. 마치 국악은 음악

이 아닌 것 같다. 그리고 그 구별의 순서도 음악과 국악이지, 국악과 음악이 되지 않는다. 때

문에 이 분류법 속에 현재의 우리 음악문화가 이루어져 있다는 말이 된다.

 이 땅의 모든 문화와 역사, 질서, 규범 등은  우리를 위해 존재하여야 한다. 이 속에서 태어

난 모든 정신적, 물질적 소산들도 그러해야 된다. 그래서 그  소산의 결과물을 부르는 용어들

도 당연히 나와 우리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 물론 음악도  그러해야 한다. 즉 우리에게 '말'은

우리말을 의미하듯이 당연히 '음악'이라는 말은, 우리의 역사와 문화 속에서 쉬지 않고 이어온

우리음악을 의미하여야 옳은 문화현상이 될 것이다. 따라서 서양을 통해 수입된 음악은 마땅

히 서양음악(줄여서 양악)으로 불려야 하고, 우리음악이  음악으로 불려야 함이 옳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말한다'라고 할 때 당연히 우리말을 하는 것으로 이해되듯이, 이 땅

에서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음악을 한다고 하면 보통의 우리들에게  당연히 우리음악을 하

는 것으로 이해되는 우리 중심의 문화적, 음악적 상식의 흐름이 있어야만 된다.

 

 ☞ 서양화된 의식의 전환을 요구하며

 우리가 서양적인 것 중심의 환경 속에서 우리자신을 모르고 싫어하게끔 되었던 사정은 우리

의 근대 역사 속에서 찾을 수 있다. 즉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소위 개화시대까

지 그 연원은 소급된다. 물론 여기까지 소급되어야 할 대상은  우리의 전통문화, 예술 전부가

해당된다. 그러나 여기서는 몇 가지 우리의 생활속 깊숙히 파고들은  잘못된 시각들, 또 잘못

된 시각으로 우리를 이끄는 것들을 간략하게나마 몇 가지 다뤄본다. 

   개화 : 우리말 사전에는 개화(開化)를 '사람의 지혜가 열리고 사상과 풍속이 진보함'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우리는 보통 이러한 정의를 받이들이면서 개화를 좋지 않았던 상황(혹은 미발

달된 상태)에서 좋은 상황(발달된  상태)으로늬 전환이라는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개화시대 이전의 우리역사는 아무런 가치도 없었던 것이 된다. 지혜도 없었고, 건전한 사상과

풍속의 지보도 없었던 것이 된다.

 우열의 입장으로 본다면 은근히 서양적인 것이 우(우),  우리의 것이 열(열)이 되게 하는 용

어가 개화이고, 또 우리는 그렇게 여겨왔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개화보다는 서양화라는 말을

씀이 옳다고 본다.

   한복은 죄수복인가? : 우리들은 우리의 오랜  역사와 문화를 입으로는 자랑하면서도 행동

으로는 그렇지 못하다. 그 대표적인 예중 하나가 한복이었다. 즉 우리들은 한복의 아름다움을

자랑하면서도 이를 평상복으로는 입지  않고 어쩌다 입는다. 그런데  한복을 거의 매일 입는

이들이 있는데 그들은 술집 여인네들이요, 또 죄수(주로 정치범)라는 이야기이다. 요즈음에는

개량한복이 잘나오면서 한복을 입는 모습이 자주 보인다. 우리의 것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점

점 많아진다는 것이다. 그래도 한 때나마 한복을 죄수복으로 만들었던 것이 부끄럽다.

   영화 [사랑이야기]와 [살인현장]

 예전에 [사랑이야기]라는 감동적인 영화가 있었다. [살인현장]이라는 뛰어난 영화도 있었다.

그리고 [음악의 소리]라는 영화, [속임수] 혹은 [사기꾼]이라는 영화가 있었다. 모두 좋은 영

화였다.

 필자는 이 영화들을 다보았다. 그리고 영화를 통하여 진한 감동과 재미를 맛보기도 하였다.

그러난 이들 영화를 본 이땅의 우리들은 불과  얼마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이 땅에서 개봉된

영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Love Story], [Killing Field], [Sting], [Sound of Music]이라는 영화가 있었다. 국내에

서도 개봉되어 많은 영화애호가들의 사랑을 받았던 영화들이었다.

 우리의 언어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위의  영화들을 의도적으로 소개하였다. 앞의 4종

의 영화와 뒤의 영화들은 같은 것들이다. 그러나  우리의 머리는 앞의 방법으로 이를 이해하

려하지 않는다. 뒤의 방법으로만 이해하려고 한다. 그만큼 우리는 영어를 잘한다(?). 그러면서

도 정작 영,미인을 만나면 입은 다물어진다.

 뒤의 [Love...] 등등을 사용하지 말자는 말이 아니다.  왜 [Love...]등등으로만 이를 이해하

려고 하는가? 앞의 [사랑...]등등으로 이해하면 속된  말로 어디가 덧나서 안되나? 그리고 이

둘을 순간적으로 다 이해하는 두뇌 회전력을 가지면 큰 일이 나는가? 이는 우리의 언어가 서

양화되는 과정에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극히 일부의 현상 중 하나이다. 이와 같은 현상

속에서 우리 문화와 우리음악에 관한 사랑의 정신이 싹틀 수 있을까? 그리고 진정 이들을 어

떻게 이해하는 것이 우리에게 도움이 될까?

 우리언어의 세계화란, 우리가 외국어를 잘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한글을 세계로 널리 알

리는 것이다. 다른 부분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의 세계화는 이런 모습이 아니다.  

 우리는 세계화가 아니라 서양화를 추구하고  있다. 우리의 것이 없는 상황속에서 남의  것을

받아들인다면 우리의 모습이 어떻게 될까? 우리는  이제 우리의 모습을 찾아가야 한다. 잃었

던 우리자신을 찾는 다면 그 어떤 타문화가 들어와도 우리의 것으로  소화해낼 수 있을 것이

다. 그것만이 풍물굿(우리문화)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이다. 밤잠 설쳐가며 자료를

만들면서 가장 고민됐던 것이 "어떻게 접근해서 어떻게 연결을 해나갈 것인가?"였다.

 조금은 뜻을 비쳤지만 받아들이는 입장에 따라 이 글이 유익할 수 있고, 그냥 그럴 수도 있

다. 모쪼록 글쓴이의 뜻을 알아주었으면  한다. 남을 위해서 자료를 정리한  것이 처음이라서

미숙하고 욕심에 따르지 못했지만, 그래도 열심히 했다는 것을 위로 삼고 기회가 주어진다면

더 깊은 대화를 했으면  하고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다시한번 자신을 돌아보기를

바란다. 자신은 우리의 것을 얼마나 알고 있고,  사랑하고 있는가?, 혹 자신은 현재의 개인주

의적인 자본주의문화에서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는지?

 우리가 우리의 문화를 모르는 이런 사회적인 모순속에서 우리가 해야할 일이 무엇일까?

우리가 우리를 안다는 것은 타문화에 대한 자생력을 뜻한다. 서양의 자본주의 문화가 물밀듯

이 들어왔던 일제시대(물론, 지금은 그 속에서 살고 있다.)에 우리는 이미 우리라는 자존심을

포기하기 시작했다. 모든 행동(말과 생각)의 기준이 우리가 주체가 된다면  그것이 나쁜 것일

까? 그렇다고 다른 문화를 무시하고 '나 잘났다'하라는 소리는 아니다. 문화와 문화의 충돌은

누구도 어쩔 수 없는 자연스런 현상이다.

 지금 우리는 문화의 전쟁 속에서 살고 있다. 이 전쟁속에서 살아남고자 한다면 우리도 무기

를 가져야 한다. 그 무기는 물론  우리의 문화이다. 그러나 현재 서양의  문화에 대해 방어할

수 있는 무기를 가진 사람이 얼마나 될 것인가.

 여기서 이런 무기를 만드는 사람은 우리들이다. 우리들이 무기를 열심히 만들고 보충해가며

무기를 갖지 못한 사람들을 무장시켜야 한다. 그래야 이 전쟁속에서 우리들(우리문화)이 살아

남을 수 있을 것이다.

 

 한 민족에게 있어서 문화라는 것은 그 민족을 타민족과 구분할 수 있는 중요한 차이점이다.

아무리 좋은 이상과 원대한 목적도 행함이 없으면 탄생과 동시에 사망의 길을 걷게 된다. 때

문에 지금까지 했던 논의(인정한다면)도 행함이 없으면 소용없는 일이 될  것이다. 또한 가치

없는 외침이요, 또 다른 문화적 상실을  낳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중단 없는 행함만이

우리에게 절실한 것이다.

 행함 없는 앎은 가치가 없다. 위선이요, 거짓일  수도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생각뿐인

이론이 아니다. 말뿐인 이론은 더더욱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실천이다. 이 실천의 과

정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그러나 그런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우리민

족에 대한 애정과 사랑이다.

 모든 사람들이 이런 생각들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의 생활은 정말 살만한 세상이 될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