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자의 건강법


 [장량] 살인자의 건강법




 1.


 천둥이 치고 비가 내렸다.
 낮인데도 세상은 어둡고 춥다. 얼마 전 보수 공사를 마친 터라 성벽은 조금도 허물어지지 않았지만, 하늘이 새까맣게
 되도록 내리는 비는 보는 사람의 마음을 어둡게 한다.

 “하루 이틀 내로 그칠 비가 아닌 듯 하구나-.”

 바네사 백작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비대하고 기름진 그의 몸은 숨 쉬는 것조차도 버거운 듯 거친 숨을 쌕색 내쉰다. 삼, 사중으로 접히는 턱은 미녀가
 들이 밀어준 고기 덩어리를 흉물스럽게 씹어댔다. 미녀의 머리만한 고깃덩어리가 백작의 입속에서는 작은 미트볼처럼
 쉽게 잘려나갔다.
 말하고 먹고 싸고 자는 것 외에는 도무지 하는 일이 없는 백작은 그나마도 힘든 듯 했다. 그의 접힌 살 사이로 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아무리 집안이라지만, 가채까지 벗어던져 놓은 모습은 영락없이 털이 숭숭 빠진 늙은 암퇘지다.
 고기를 입에 넣은 미녀가 하얀 수건으로 그의 이마와 목 주변의 땀을 닦았다. 닦기가 무섭게 다시 흘렀지만.
 겨울인지 가을인지 구분 할 수 없을 정도의 추위 속에서도 비 오듯 땀을 흘리는 백작의 앞에는 청년이 다소곳하게
 앉아 있었다.
 감히 천사와 비교할 수 있는 그의 사랑스러운 막내아들. 바네사 레인.
 3년간의 고된 유학생활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지 2주밖에 안된, 백작의 자랑스러운 아들이다.
 그의 낮지도 높지도 않은 청명한 목소리가 공간을 울린다.

 “수도는 가까우니 하루정도면 도착할겁니다. 내일 새벽부터 바쁘게 움직이면 저녁에는 성 안에서 편히 잘 수 있어요.”

 내리깐 속눈썹 아래로 뽀얀 그늘이 진다. 등 중간까지 내려오는 새까만 머리카락은 빛의 홍수 속에서도 고고한 어둠을
 그러안고 있었다. 신비한 금안은 총기로 가득했고 그만큼이나 순수하다. 창백한 두 뺨과 오물거리는 다홍빛 입술 역시
 처녀들의 질시를 모을 만큼 고왔다.
 세상의 티는 하나도 모르고 자란 듯 맑고 선한 기운이 그의 미간에 서려있었다.
 아버지의 비대한 몸에 비한다면, 레인은 가냘플 지경이었다.
 머리와 눈 색깔 외에는 전혀 닮은 점이 없는 부자였다.
 바네사 가문의 식탐은 유명했다. 대대로 그들 가문의 남자들은 비대하고 뚱뚱했으며, 종내에는 온갖 성인병으로
 고생하다 사망하곤 했다. ‘백 돼지 가문’ 이라는 놀림조차도 그들의 식탐을 꺾지는 못했다. 무언가를 탐하는 것은
 신에 대한 불충이었지만, 배덕한 귀족들 중에 신을 유념해 욕구를 참는 자들은 없었다. 특히 바네사들도 그랬다.
 그들이 쓰는 물건은 그 큰 엉덩이를 담을 수 있을 정도로 커야했고, 엄청난 무게에도 견딜 수 있어야 했으므로 자연히
 바네사 지방은 공예가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 피에는 한명의 예외도 없었으며 조금이라도 피가 섞인 자는 모두 비만을 면하지 못해왔다.
 허나, 바네사 백작이 말년에 얻은 막내아들만은 그렇지 않았다.
 먹는 것에 욕심내지도 않았으며, 운동을 싫어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조금 마른 듯도 했다. 총명하고 민첩했다. 착하고 공손하며 오만하지도 않았다.
 남이 봐도 예쁜데, 백작이야 오죽했겠는가-. 할 수만 있다면 레인에게 백작자리를 물려주고 싶을 정도로 총애에,
 편애를 했다.
 한시도 떼어 놓고 싶지 않은 사랑스러운 아들이었건만, 그 자신의 공부에 대한 욕심으로 지난 3년간 속국 제르바에
 유학을 다녀왔다.
 3년만에 본 아들은 ‘혹시나’ 하는 염려와 다르게 훨씬 더 아름다워져서 돌아왔다.
 나이가 들면 때 탈 것이라고 여겼던 순수한 눈빛도 예전 그대로였다.

 “그보다, 아버지도 모시고 갈 수 있었다면 좋았을텐데-. 아쉽군요.”

 레인의 말에 백작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저 예쁜 입에서는 어찌 저리 고운 말만 나온단 말인가!
 가늘게 내쉬는 한숨은 레인이 진심으로 아쉬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줬다.
 감동한 백작에 눈에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액체가 고였다. 흉측했지만 방에 있는 누구도 미간을 찌푸리지 않았다.
 일주일 후, 곧 열릴 파티는 태자의 승전 파티였다. 제국은 나날이 강대해졌고, 짓밟힌 타국들은 폐허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번에 전투를 마친 치첸국에는 더 이상 처녀가 없을 터였다.
 나라와 왕과 신민을 수호하며 영토를 넓힌 제국의 군대는 타국에서는 비난받을지언정 제국에는 영웅이었다.
 백작 역시 그 영웅들을 치하하기 위한 파티의 초대장을 받았지만, 그는 비대한 몸 때문에 성(은 커녕 제 방조차)을
 한발자국도 나갈 수가 없었다. 매번 대신 가던 후계자 메이 역시 아버지를 닮아 비대해진 몸으로 거동이 불편한
 지경에 이르렀다.
 다른 아들들도 있지만 대부분 보기 흉할 정도까지 살이 쪄서 파티에 나가봐야 좋은 눈길 하나 받지 못했다.
 요즘 세상에, 귀족들이 하는 일이라고는 몸치장뿐인데, 그것 하나 제대로 해내지 못한 바네사 직계는 사교계에서
 환영받는 존재가 아니었다. 뚱뚱하다는 이유 하나로 더 낮은 계급의 귀족에게까지 조소와 멸시를 받는 상황이
 계속되자 그들은 사교계에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매일같이 파티가 열리는 제국이지만, 바네사 가문은 올해를 통틀어 이것이 세 번째 외출이었다. 그나마들도 왕의
 생일이나 하는 국가 경축일이 아니면 그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백작은 이번 파티에 레인이 참여 한다는 것이 불안한 한편, 희열감을 느끼기도 했다.
 우리 가문에도, 이렇게 잘생기고 날씬한 아들이 있다, 는 것을 알려줄 수 있는 것이다. 레인을 보고 ‘어느 가(家)
 귀족자제가 저리도 아름다운가!’ 하며 감탄할 사람들을 생각하니 통쾌할 지경이었다.
 아버지의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레인은 천사가 강림한 듯 신성한 표정으로 두 손을 맞잡고 말했다.

 “아버지의 병세가 빨리 회복되도록 빌고, 또 빌겠어요. 신도 제 기도를 모질게 내버리진 않으실 겁니다.”
 “오오, 레인-!”

 백작은 아들의 등 뒤로 하얀 날개가 보이는 것 같은 착시에 시달려야 했다. 백작을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병이 아니라 살이었지만, 그런 것은 전혀 상관없었다.
 꼭 껴안아 주지 않으면 견딜 수 없다는 생각에, 백작이 육중한 몸을 의자에서 일으켰다. 사람이라기보다는
 기름덩어리에 가까운 그가 출렁대며 움직였다.
 찰랑. 그 순간, 기도하던 레인이 스르륵 고개를 들었고, 그의 하얀 얼굴을 가리던 검은 머리카락이 바람결에 흔들리며
 반짝였다. 검은 속눈썹 아래 금안이 순결하게 반짝였다.
 스륵, 일어난 레인이 가볍게 목례 했다.

 “전 이만 여정을 꾸리러 가보겠습니다. 아버지, 너무 걱정 마시구요-.”

 조금 몸을 일으킨, 그러나 자세히 보지 않으면 뭐가 달라졌는지 알 수 없는 자세의 백작은, 약간 뻘쭘한 기분으로
 뻗던 손을 내리며 근엄하게 대답했다.

 “오냐. 레인. 부디 무사히. 너에게 신의 가호가 함께하길.”
 “고마워요, 아버지.”

 레인이 방긋 웃었다. 녹아내릴 듯 달콤하고 순박한 미소다. 차분하게 아버지에게 이별의 목례를 건넨 레인이 진지하고
 비장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날씨가 춥습니다, 샬롯. 방에 온도를 더 높여주세요. 나 없는 동안에도 아버지를 잘 부탁드립니다.”

 레인의 말에, 백작 옆에 있던 미녀가 조금 짓궂은 표정으로 웃었다. 단 이주일간 헤어져있는 부자의 이별장면치고는
 너무 비장하고 애틋했다.
 부탁한다는 듯 그녀의 어깨를 툭툭 친 레인이 조금 피곤한 표정으로 방을 나섰다.
 문 밖으로 빠져나가는 아들의 작은 실루엣을 보는 백작의 마음은 어쩐지 조마조마했다. 저 착하고 여린 것을 승냥이
 같은 귀족들 틈바구니에 방치해야 한다니. 못내 마음 아팠다.
 아들에게 이런 말을 한다면, 고 여린 얼굴로 엄중한 표정을 지으며 ‘그런 말씀 마세요, 아버지. 만나보기 전부터
 선입관을 가지고 싶지 않습니다. 분명 좋은 사람들 일거라 믿어요.’ 라고 할 테지만-.

 “하아-.”

 백작이 짐승처럼 숨을 몰아쉬었다.
 창밖에 내리는 비처럼, 그의 마음이 축축하고 어두웠다.



 * * *



 방을 나선 레인의 걸음이 빠르게 방으로 향했다. 그의 빠른 발걸음에, 검은 머리카락이 출렁대며 흩날렸다.
 어느 샌가 뒤로 따라붙은 젊은 시종이 그의 꽁무니를 쫒느라 땀을 뻘뻘 흘렸다. 오늘 처음 그를 접한 초짜
 시종이었다. 이 주인에 대한 모든 이야기는 함구되어 들을 수 없었지만 문틈 사이로 엿들은 그의 행실을 생각하면
 아주 착하고 좋은 주인임이 틀림없었다.
 복도의 중간쯤에 다다랐을 때, 레인의 조그마한 입술에서 한숨 같은 단어가 내뱉어졌다.

 “목욕.”
 “...예? 예?”

 저 촉촉한 입술이 말을 한 것인가?
 꽁무니를 쫒는 것에만 바짝 긴장하고 있던 시종이 땀을 닦으며 되물었고 바람처럼 걸어가던 레인이 우뚝. 자리에
 멈추어 섰다.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어깨와 등에 안착하는 모습이 마치 꿈결 같이 아름다웠다.
 돌아선 레인이 눈을 내리깔며 웃었다.
 젊은 시종은 다가오는 하얀 손길에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같은 남자라는 것을 알지만, 그는 너무
 아름다웠다. 음심이 느껴진다기 보다는, 신성한 천사 같아서 범접하기 힘들었다. 보드라운 손이 볼에 닿는 순간
 시종이 헉, 하고 숨을 몰아쉬었고, 높은 콧대만큼이나 오만하게 그의 입술이 열렸다.

 “멍청이.”

 짜악. 살과 살이 아프게 맞부딪히는 소리가 복도를 흔들었다. 넋 놓고 있던 시종은 날카로운 아픔과 함께 땅바닥에
 나동그라졌다. 귓가가 멍멍할 만큼 날카로운 따귀였다.
 입가에 피를 흘리는 시종을 냉담한 눈으로 훑은 레인이 하얗고 단정한 손을 흔들었다. 더러운 것을 만졌다는 듯
 손수건으로 깨끗이 닦는 것도 잊지 않았다.
 갑자기 돌변한 주인의 행동과 아픔 때문에 겁에 질려 일어나지 못하는 시종의 머리를 구두로 밟으며, 레인이 한 번 더
 한숨을 내뱉듯 나른하게 말했다.

 “목욕. 준비해.”
 “예..! 예!”

 대답하는 시종에게 만족스럽다는 눈길 하나 건네지 않았다.
 손을 닦은 손수건조차 더럽다는 듯 카펫 바닥에 버린 레인이 어깨가 결린 듯 매만지며 다시 걸었다. 그 뒷모습이
 잔인할 만큼 아름답고 순수해 보였다.




 2.


 “목욕이 준비되었습니다.”

 터진 입가에 피조차 닦지 못한 채 급하게 목욕을 준비한 시종이 벌벌 떨며 레인에게 전했다.
 푹신한 의자에 깊게 앉아 레드와인을 마시는 레인은 들었는지 듣지 못했는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사실, 레인의 온
 신경은 아버지의 비대한 모습을 뇌에서 지우는 데에 집중되어 있었다. 3년 전에 비해 아버지의 육중한 비계는 조금도
 감소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늘었다. 역겹고 흉측했다.
 아무생각도 없는 무뇌아처럼 맹한 눈을 하고 방긋방긋 웃어 보이면, 마냥 좋아서 땀을 뻘뻘 흘려대는 모습이
 불쾌하리만큼 우스웠다.
 그 앞에서 순진한 척 하기는, 어린아이의 돈을 빼앗는 것보다도 쉬웠다.
 레인이 아름다운 것은 진실이다. 백작이 제 자식이라 예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레인은 실제로 이목구비 어느 곳
 하나도 빠지는 곳 없었고, 천사처럼 선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하지만 그가 그 선한 생김새만큼 마음씨도 곱다는 것만큼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레인은 난잡하고 분별없는 성생활을 즐겼고, 오만하고 교만했다. 배덕과 악덕에 구애받지 않았으며, 상당히 게으른
 편이었고, 머리도 빈- 요란한 수레였다.
 고 자그마한 머리통에 든 것이라곤 여자를 꼬시는 법과 아는 척, 있는 척 하기 위한 단발성 상식들. 눈앞에 여자와
 어떤 체위의 섹스를 나눌까 하는 정도밖에 차있지 않았다.
 나라로 돌아온 후 2주 동안, 아버지의 얼굴보다, 근처 물 좋은 ‘아가씨의 집- 레지나’의 인기 창녀 이렌느의 은밀한
 곳을 몇 배나 많이 보았다.
 그가 아랫도리를 휘두르는 데는 귀족도 창기도 평민도 상관이 없었다. 아랫것들을 보는 시선은 턱없이 거만한 주제에,
 여자의 음지가 귀천에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던 것이다.
 레인은 신 앞에 망종하고 부도덕했다 -그리고 그건 레인 자신도 알고 있었다. 굳이 아니라고 할 생각도 없었다.
 타락은 빠져들수록 달콤한 것. 거부할 수도, 거부할 이유도 없었다.
 레인의 이런 이중적인 행동은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몰랐다.
 노골적인 야한 농담에 얼굴이 붉어지며 수치를 느끼는 자들은 대부분 몰랐고, 같이 농탕질하며 유쾌하게 킬킬댈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아버지의 포옹을 혐오스럽다는 듯 피하는 아들이라니-. 지옥 불에 떨어질 불효자로군요.”
 “아, 이런 샬롯-. 아버지 방에 불은 높이고 오는 것이겠지요?”

 야한 농담에 후자처럼 반응할, 백작의 애첩 샬롯이 레인의 말에 눈웃음을 치며 웃었다. 어느새 그녀는 도둑고양이처럼
 사뿐한 걸음으로 그의 옆에 다가와 있었다.

 “물론이지요. 불효자가 떨어져야 마땅할 지옥 불만큼 뜨거워서, 한여름 볕 아래 나앉아 있는 것이 오히려 시원할
 겁니다.”

 내일 아침이면 침대가 물 먹은 스펀지처럼 젖어 있을 거라는 말을 추가하며 깔깔댔다. 레인도 따라 키득거렸고 그녀의
 손목에 키스했다. 그녀의 임무완성을 치하하듯 한참이나 그 손목과 손등에 키스를 했다.
 배가 아플 만큼 웃은 그녀가 키들거리며 레인의 손에 들렸던 잔을 빼앗아 탁자위에 놓았다. 그리곤 레인의 다리
 사이에 무릎을 내렸고 레인이 그녀의 나이트 가운 속으로 손을 넣었다. 샬롯이 입은 나이트 가운 위로 레인의 손이
 움직이는 선명한 실루엣이 드러났다. 관능적인 애무.
 레인의 목욕을 준비하고 기다리던 시종이 놀라 숨을 들이켰다.
 위에서 노닐던 손이 샬롯의 아래 부위로 내려가며 숨었다. 간간히 허벅지를 쓰다듬는 하얀 실루엣이 비쳤다. 레인이
 음탕하게 웃으며 그녀의 몸을 농락했다. 무엇을 했는지는 보이지 않았으나, 곧 샬롯이 자지러지며 그의 품으로
 떨어졌다.
 그녀의 은밀한 곳에 손을 넣어 지분거리며 풍만한 가슴에 얼굴을 묻은 레인은 생각했다.
 샬롯, 이 요망한 것-. 똑똑하기도 하지.
 멍청한 아버지는 눈치 채지 못한 것을 알고 있었다.
 맞았다. 아까 전 백작의 방에서 레인은 그의 포옹을 의식적으로 피했다. 물론-. 총애하고 좋게 봐주는 것이야 의도한
 바이니 나쁠 것은 없지만, 아까처럼 껴안는다거나 스킨십을 시도하고자 할 때는 곤란하다.
 레인은 그 시큼한 땀 냄새와 향수 냄새가 뒤섞인 아버지의 비계가 끔찍하게 싫었다. 어릴 적에 물컹한 뱃살에 손이
 닿았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할 정도다.
 한참을 아버지의 비계에 대해 눈살을 찌푸리고 있던 레인은 샬롯의 비음 섞인 재촉에 이를 움직여 나이트 가운 속에
 브라를 열었다.
 긴 나이트가운 아래로 붉은 브라가 떨어졌다. 어깨위로 흘러내린 가운 속에서 풍만한 하얀 가슴이 드러났고 훔쳐보던
 시종은 점점 숨을 죽였다. 백작이 아끼는 첩의 가슴을 보다니. 능지처참을 당해도 할 말이 없지만 눈을 돌릴 수가
 없었다.
 레인의 무릎위에서 손가락만으로 농락당하던 샬롯의 가운은 벌써 허리까지 내려왔다.
 시종은 저도 모르게 부풀어 오르는 중심을 손으로 잡고 침을 삼켰다.
 시종은 눈을 감고 신을 외쳤지만, 곧 다시 뜰 수밖에 없었다. 하얀 나신이 눈앞에서 아른거렸기 때문이었다. 눈을 뜬
 시종은 그녀의 가슴을 입에 문 레인과 눈이 마주쳤다. 벌겋게 눈이 충혈 된 시종을 본 레인이 음탕하게 웃으며 샬롯의
 유두를 물었다.
 시종은 그 뒤론 눈을 감을 수도 없었다. 그 촉촉하게 젖은 금안과 눈이 마주친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아야
 했다.
 푸른 가운이 벗겨진 위로 가냘픈 허리에 감긴 하얀 셔츠속의 레인의 팔. 가슴을 핥는 붉은 혀, 가늘게 떠져서 탁하게
 빛나는 금안. 그 모든 것이 끔찍할 만큼 매혹적이었다. 잔인할 만큼 탐스러웠다.
 높은 교성을 지르는 흔들리는 가슴보다 그것을 움켜잡은 레인의 젖은 손이 더 관능적이었다.
 악마-. 마귀 같았다. 유혹해서 잡아먹는 색마가 바로 저러하겠는가. 키득키득 웃으며 셔츠에 단추를 푸는 레인은
 겁탈하고 싶을 정도로 색정적이었다.
 시종은 한껏 부푼 중심을 터질듯이 움켜잡고 속으로 신을 불렀다. 오, 오 신이시여.
 -하지만, 자위하는 자리에서 부르는 신만큼 우스운 것이 또 있을까? 레인의 귀를, 몸을 훔쳐보며 제것을 문지르는
 시종의 머리에서 신은 금세 자취를 감추었다.
 마치 발정난 개처럼 정신없이 자위를 하는 시종을 보고 레인이 쾌활하게 웃었다. 한참이나 웃은 레인은 그를 향해
 바닥에 떨어진 붉은 브래지어를 던져줬다. 그리곤 샬롯을 안고 일어났다. 그녀의 목에 키스를 퍼부으며 가벼운
 걸음으로 목욕이 준비된 욕실로 걸어 들어갔다.
 그 뒷모습을 보며 바지 안으로 손을 집어넣은 시종이 헥헥거리며 눈을 뒤집었고, 곧 절정에 다다랐다.
 문이 닫힌 욕실 안에서 샬롯의 교성과 함께 레인의 숨소리, 참방대는 물소리가 들렸다.
 욕실 안에 시중을 들기 위한 시녀가 둘이나 된다는 것을 떠올린 시종이 꾸덕한 정액에 젖은 손을 카펫 위에
 떨어뜨렸다.
 창밖에는 우울한 비가 쉼 없이 내리고 있었고, 배덕의 밤은 깊었다.



 * * *



 아침이 밝았고 비는 그칠 줄을 몰랐다. 그리고 레인은 다시 가증을 떨었다.

 “아버지가 많이 아프시단 말입니까? 오, 저런.”

 탄식을 내뱉는 그는 오늘따라 더 단아했다. 금색 깃이 달린 커다란 모자와 허리선이 들어간 하얀 코트. 목깃에
 수놓아진 금색 자수도 그를 아름답게 보이도록 하는데 일조 했지만, 그의 피곤한 듯한 한숨이 특히 그랬다. 약간
 거뭇해진 눈가는 그가 초연해 보이도록 만들었다.
 마중을 나오지 못한 아버지의 병환소식을 듣고 탄식을 뱉는 아들이 ‘피곤한 이유’ 로는 어울리지 않지만, 레인은
 어제 밤새도록 이어진 과도한 성생활 때문에 숙면을 취하지 못했다.
 처녀인 줄 알았던 목욕 시녀들이, 생각보다 성욕이 왕성한 아가씨들이었던지라 동이 밝아올 때 즈음엔, 진이 쪽 빠진
 해파리마냥 늘어졌던 것이었다.
 밤새 땀을 많이 흘려 탈진한 아버지를 대신해 마중 나온 비쩍 골은 어머니의 앞에 레인은 무릎을 꿇었다. 그리곤 신
 앞에서 하듯한 경건한 표정으로 그녀의 닭 뼈 같은 손가락에 입을 맞추었다.

 “레인-. 신의 가... 쿨럭! 가호가...쿨럭, -쿨럭!”

 금방이라도 픽 쓰러져 부서질 것 같은 늙은 어미의 기침에 레인이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그녀가 말하는 신의 가호를
 기다리다간 늙어 죽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피를 토할 것 같은 기침이 계속되고 주변에서는 키득대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꿇어앉은 레인의 눈가도 가늘게 떨렸고
 인내심은 동이 났다. 어제 밤새 엉덩이를 흔들던 샬롯의 키득거림에 남자의 자존심도 쪼개졌다.
 결국 머리끝까지 짜증이 난 레인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어머니도요.”
 “아..."

 허옇게 떴던 어머니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레인이 그렇게 노골적으로 그녀의 말을 끊어버리자, 좌중이 곧
 썰렁해졌다. 이번만은 참지 못하겠다는 듯, 뒤에 서 있던 샬롯이 베일 아래로 풋, 하고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샬롯, 저 망할 것이. - 레인은 속으로 중얼거렸지만 무안한 표정으로 기침을 참는 어머니를 향해 따뜻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곧 상냥하고 친절한 표정으로 일어나 어머니를 따뜻하게 감싸 안았고,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 그녀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그리고 날카롭게 소리쳤다.

 “샬롯!”

 벌써 웃음을 베일 안으로 감추고 얼굴을 굳힌 샬롯이 고개를 숙이며 앞으로 나섰다.
 여우같은 것-. 레인은 정말 샬롯이 마음에 들었다. 정말 샬롯은 타고난 애첩이었다. 영민한 머리 뿐 아니라, 은밀한
 곳의 음탕함도 그러했다.
 레인은, 아버지가 돌아가신다 해도 그녀가 골방에 갇히게 놔두지는 않을 것이었다.

 “공기가 얼음장 같이 차가운데, 어머니의 옷이 이렇게 얇다니! 믿을 수가 없군요. 건강한 당신이 어머니를 챙기지
 않으면 누가 챙기겠습니까? 샬롯! 내 다녀와서도 이렇듯, 어머니에게 소홀한 것이 보인다면 그 누구도 아닌, 당신을
 벌할 것입니다! 아버지뿐만 아니라, 당신의 손이 닿아야 할 곳은 많습니다.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예. 도련님. 말씀대로.”

 노한 듯한 레인의 엄명에 샬롯이 머리를 허리까지 숙이며 바르르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비오는 하늘만큼이나 흐렸던 어미의 얼굴이 활짝 밝아졌다.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목에 스카프까지 둘러주는
 자상한 아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을 느꼈다. 그리고, 한껏 어깨를 움츠리며 고개를 숙인 요망한 애첩의 모습에도
 통쾌함을 느꼈다.
 레인은 그녀의 친아들이 아니었지만, 샬롯 앞에서 꼼짝도 못하는 친아들들보다 레인이 더 고맙고 사랑스러웠다.
 고개를 숙인 샬롯의 가르마를 보며 레인도 웃었다. 어미의 텅 빈 머리와는 다르게, 저 영특한 머리는 레인의 말을
 모두 알아들은 듯 했다. 레인은, 샬롯의 바르르 떨리는 어깨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해서임을 알고 있었다.
 레인이 지금 한 말은 모두의 앞에서 샬롯의 안주인 행세를 인정한다는 뜻이었다. 백작의 총애를 뒤에 업은 레인의
 말은 큰 힘을 가질 터였다. 단번에 샬롯에게 힘을 얹어 줄 수는 없지만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면, 낮은 것들은 진짜
 따라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 쉽게 판단한다. 비쩍 마르다 못해 뇌수까지 말라버린 듯한 어미는 눈치 채지 못하고
 환하게 웃고 있기는 했지만.
 모두가 술렁술렁하고 샬롯이 웃음을 참느라 빨갛게 된 얼굴로 고개를 들었을 때, 레인은 즐거운 미소를 지으며 마차에
 올라탔다.
 아쉬운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들 틈바구니 속에서 레인은, 어제의 시종을 발견했다.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
 고개를 숙이는 시종의 모습에 유쾌하게 웃었다. 마주친 눈에서 자괴감과 경멸을 보았다. 레인은 수치를 가장한 위선도
 사랑했다. 저 얇은 가면이 깨어지면 쾌락 앞에 무력한 짐승일 뿐이기에. 어제 그 발정난 개처럼.
 하늘은 먹구름으로 가득했고 공기는 어두운 습기로 무거웠다. 그래도 수도로 떠나는 것은 레인에게 무한한
 기쁨만이다. 비계 냄새나는 성을 떠나는 것도 그렇거니와 새로운 여성들의 음지를 탐험하게 될 것이라는 점이 특히.
 마부가 마차의 문을 닫고 커튼을 내리자 실내는 어둑해졌다.
 푹신한 벨벳 쿠션에 피곤한 몸을 눕혔다. 레인이 눈을 감자 검은 속눈썹이 그의 얼굴에 드리워졌고, 마차 안에는
 적막한 침묵이 감돌았다.
 달그락 달그락, 하며 고아한 사두마차의 흔들림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레인이 피곤한 숨을 내 뱉으며 잠으로 빠져들려는 찰나, 의자 뒤에서 하얀 손이 스륵 뻗어 나왔다. 손길을 느낀
 레인의 입가에 고소가 맺혔다.

 “이렌느.”

 레인이 이름을 부르자, 풍성한 금발의 인형 같은 외모를 가진 여자가 레인의 얇은 셔츠 위를 손으로 쓸어내리며
 나타났다.
 근방 최고의 창녀 이렌느. 그녀가 방긋 웃으며 입을 맞췄다. 가늘게 눈을 뜬 레인이 이렌느의 풍성한 금발을 쓸어
 넘겼다. 마차의 흔들거림에 맞춰 그녀의 머리카락이 폭포수같이 출렁이었다.
 그녀가 교태롭지만 한편 도도한 표정을 지으며 발칙한 혓바닥을 움직여 속삭였다.

 “마상(馬上)에서의 섹스는 처음이에요.”
 “처음? 근방에서 성교로 가장 유명한 계집인 네가?”

 레인이 킬킬거리며 웃자, 이렌느가 그의 머리카락에 튄 빗방울을 혀로 삼켰다. 가장 음란하다는 칭찬에 기분이 좋은
 듯 머리카락을 씹으며 웃는다.
 레인의 한 팔로는 이렌느의 가는 허리를 안고 남은 팔로 커튼을 조금 젖혔다.
 빗소리가 들리고 시원한 바람이 스쳤다. 조금 춥다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바르르 떨며 이렌느가 그의 품에 안기자
 레인이 말했다

 “수도까지는 한나절이나 걸릴 테니, 그동안 지루한 풍경대신 그대의 성지와 은밀한 대화나 나눌까 싶은데-.”

 깔깔 웃은 이렌느가 풍성한 치마단을 훌렁 잡아 올렸다. 붉은 망사 스타킹 안으로 새하얀 다리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속옷으로 감추지 않은 음란한 숲도 함께.
 무릎을 살짝 굽혀 레이디가 인사하듯 고개 숙인 이렌느가 개구쟁이처럼 웃었다.

 “영광이지요.”




 3.


 콰즉!!!!

 강풍과 함께 쏟아지던 비가 결국 사고를 쳤다. 번개가 무섭게 친다 했더니, 바로 옆에 떨어진 것이다. 지축을 울리는
 굉음과 함께 말들이 놀라 사방으로 날뛰었다.

 “꺄악!”

 마차가 요동쳤고 이렌느가 놀라 날카로운 비명을 뱉었다.
 이렌느의 치마폭 안에서 교활한 혀로 진지한 대화를 나누던 레인도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래봐야 치마폭 안이었지만.
 진득한 것이 잔뜩 묻은 입술을 혀로 핥으며 치마를 걷어내자 넓은 마차에 한쪽이 완전히 무너져 내린 것을 볼 수
 있었다.
 천천히 기우는 마차 때문에 이렌느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레인이 입맛을 다시며 쯧, 하고 혀를 찼다.
 발칵 문이 열리고 대동하던 기사가 다급히 말했다.

 “도련님, 무사 하십니까?!”
 “아아-. 무슨 일이지?”
 “번개에 맞은 나무가 마차로 쓰러졌습니다. 말을 타셔야 할 것 같습니다.”

 기사의 말에 레인이 미간을 구겼다. 말을 타고서는 섹스를 할 수 없었다.
 기사의 눈이 이렌느의 흰 다리에 쏠리는 것을 보고 레인이 쿠션을 던졌다. 퍽, 하고 맞은 기사가 시뻘겋게 붉어진
 얼굴로 눈을 돌렸다.

 “이렌느. 치마 내려. 오늘 유희는 이걸로 끝내야겠구나.”
 “흐응-.”

 이렌느가 눈을 가늘게 하며 웃었다. 아쉽다는 뜻이었다.

 “아, 저. 우의는 한 벌 밖에 준비가 안됐는데...”

 기사가 더듬거렸다. 당연했다. 이렌느가 여기에 타 있다는 것은 아무도 몰랐다. 마차가 워낙에 방음이 뛰어나기도
 했지만, 남자들뿐인 이 일행은 전혀 예상치 못했을 것이었다. 그들은 모두, 레인이 선하고 올곧으며 여자라곤 제
 어미밖에 모르는 사내로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레인이 한숨과 함께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이렌느가 교태를 부리며 목에 키스하는 것을 보듬으며 레인이 물었다.

 “수도까진 얼마나 남았지?”
 “마차를 버리고 말을 타고 가면 20분 정도면.....”
 “20분?”

 레인이 생각에 잠기자 이렌느가 고새를 참지 못하고 젊은 기사를 향해 눈웃음 쳤다. 80노인도 서게 할 만한 이렌느의
 야한 표정에 기사의 중심이 발딱 솟아올랐다. 이렌느가 깔깔대며 웃는 사이에 레인이 그녀에게 단벌뿐인 우의를
 입혔다.
 어쩔 줄 모르고 발발 떠는 기사를 향해 조소를 지어보인 레인이 말했다.

 “음탕한 기사여. 공주를 그대에게 맡기겠네. 공주를 무사히 집까지 모셔다 드리게.”
 “예?”

 기사가 되물었지만 레인은 이렌느의 탐스러운 입술에 진한 키스를 퍼부었다. 천박하게도 기사가 보는 앞에서 혀를
 얽고 치열을 훑으며 입술을 빨았다. 이렌느의 입에서 야한 교성이 터져 나올 즈음에 그녀를 떼어 기사를 향해 밀어
 던졌다.
 기사가 자신의 품에 안긴 이렌느의 흠뻑 젖은 입술에 마른침을 삼켰다.
 킬킬대던 레인이 문 앞에 선 기사를 밀어내고 비가 쏟아지는 마차 밖으로 나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머리카락과
 셔츠가 비에 젖어 몸에 달라붙었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쏟아지는 비에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말에 올라탄 레인이 이렌느를 안고 얼어버린 기사를 향해 말했다.

 “그녀의 집까지 무사히 데려다 주면, 그녀가 상을 줄걸세.”

 백작의 사병단에 있는 평범한 기사 따위는 평생가도 못 받아볼, 평생 못 잊을 서비스.
 레인의 행동이 마음에 드는 듯 우의를 입은 이렌느가 방긋 웃었다.
 기사의 갑옷 위를 지분거리는 것을 보면, 집에 도착하기 전에 숲에서 일을 치를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이렌느는, 비오는 숲 바닥에서 하는 것도 처음. -이라고 말하며 웃겠지.
 레인이 젖어서 늘어지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말고삐를 당겼다.

 “10분만에 도착하도록 하지.”

 20분이나 이렌느의 공백을 느껴야 한다는 것 너무 가혹했다. 하다가 만 정사에 대한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며 레인이
 빗속에 숲길을 가로질렀다.
 먼 대지의 끝자락에 아름다운 성이 거만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 * *



 성에 들어서자마자 레인을 맞이한 것은 윌리엄 백작의 둘째아들인 베벨이었다.

 “왜 그런 비 맞은 생쥐 꼴로 돌아다니는 게요, 쯔쯧. 채신머리없기는.”

 빈정거리는 베벨을 레인이 냉담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어깨에 둘렀던 짧은 망토를 베벨인양 비틀어 짜자 물이 주룩 흘렀다. 팡, 하고 편 망토를 뒤에 선 기사에게 던진
 레인이 돌려 말하는 것도 없이 쏘아붙였다.

 “생쥐 꼴은 댁이고.”

 뒤에 선 기사들 사이에서 키득대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비쩍 마르고 멀대 같이 키가 큰 갈색머리의 베벨은 생김새가
 퍽 쥐와 닮았기 때문이었다.
 레인을 노려보는 베벨의 얼굴이 시뻘겋게 붉어졌다. 나른하게 눈을 내리깐 레인은 물에 젖은 머리를 쓸었다.
 레인이 베벨을 처음 만난 것은 유학을 빙자한 방탕여행을 하면서였다.
 제르바에 간 것은 베벨이 우선으로, 베벨은 제르바의 선진과학을 배우기 위해 1년여 전부터 그곳에 있었다.
 베벨은 레인이 싫었다. 손수 기술을 배우며 고생고생하고 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말끔한 얼굴로 온 나라의
 여자들을 희롱하는 레인이 예뻐 보일리가 없었다. 공부한다는 명목으로 오긴 했는데 오가는 곳이라곤 창녀촌과
 ‘제국의 귀족이라면 껌뻑 죽는 사교계’ 밖에 없으니, 제국 귀족 망신은 혼자 다 시키는 구나, 라고도 생각했었다.
 안 그래도 미웠지만 정말로 못 잡아먹어서 몸살이 나게 된 계기는-.

 “마리아는? 자네가 제국으로 돌아왔다면 그녀도 함께겠지?”
 “마리아?”

 참는 듯 부르르 떠는 음성으로 묻는 베벨에게 레인이 이죽대며 되물었다.
 베벨의 꿈틀대는 미간과 ‘너 설마.....’ 하는 불신의 눈을 마주하자 생각나는 여자가 있었다.
 마리아. 베벨이 죽고 못 살았던 하급 귀족의 여자.
 베벨의 외롭고 힘든 객지 생활에 여신 같은 존재였던 그녀는 파티에서 만난 레인에게 홀랑 반해 베벨을 걷어차
 버렸었다.
 뺀질뺀질한 레인의 면상이 얼마나 증오스러웠는지 모른다.
 그래도 실연의 아픔에 못 이겨 자존심도 모두 버리고, 레인을 찾아가 그 앞에 무릎 꿇고 그녀를 돌려 달라고 말했다.
 그 때 레인은 그 하얗고 작은 얼굴 가득히 오만한 미소를 띠고선 권태로운 음성으로 말했다.

 -구두라도 핥는다면 모를까.

 뼛속까지 스미는 굴욕감에 부르르 떠는 베벨을 향해 가벼운 조소를 던지고서 마리아를 한품에 끼고 유유히 자리를
 떠났다.
 그 자리에서 칼을 빼들고 죽여 버릴까도 했지만, 마리아가 사랑하는 남자라는 생각에 차마 그럴 수도 없었다.
 괴로움과 수치에 못 이겨 그대로 제국으로 돌아왔다.
 그 후로 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소심한 남자인 베벨은 그 원한을 잊을 수가 없었다. 아직도 레인을 보면 이가
 바득바득 갈리는 것이다.
 레인도 좋은 성격과는 백 만년정도 떨어져 있는지라, 자신을 향해 이를 내 보이고 달려드는 자에게는 따귀를 날려주지
 않으면 잠을 이루지 못했다. 베벨이 으르렁 대는 것에 일일이 대꾸해 주는 것은 못된 망아지 같은 성격 탓이었다.
 주먹을 꽉 쥐고 바들바들 떠는 베벨을 보며 레인은 기사가 가져다 준 모포를 몸에 둘렀다. 그리곤 비에 젖어 파랗게
 된 입술을 우물거렸다.

 “제르바에서는 아무도 데려오지 않았네.”
 “뭐? 어째서? 설마.... 네놈!”
 “.....어디서 목청을 높이는 겐가? 무례하긴. 어쨌든 마리아와는 오래 만나지 않았어.”
 “어.. 어째서?”

 잔뜩 튄 침에 레인이 미간을 구겼다. 머리카락에서 떨어지는 빗물과 섞여 별 티도 나지 않았지만 불쾌했다.
 제르바의 여자들은 소문대로 대부분 아름다웠지만 하체가 부실했다. 몇 번 자고 나면 조임이 별로여서 자주 새 여자를
 찾아 다녀야 했다. 나라의 법도가 엄해 처녀가 많다는 점은 좋았지만.
 마리아라-. 성은 기억나지 않지만 어렴풋이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와는 베벨이 제르바를 떠난 직후부터 만나지
 않았다. 일단 그녀는 별로 예쁘지 않았다. 장점이었던 커다란 가슴도 몇 번 자고 나니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았고, 큰
 가슴 때문인지 허리놀림이 둔하기도 했었다. 몇 번을 가르쳐줘도 키스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 머리도 나빴지.
 레인이 마리아와 더 이상 만나지 않게 된 계기를 떠올리며 혼잣말 하듯 중얼거렸다.

 “그녀가....셋이서 하는 섹스를 거절하기에-.”
 “이, 이 개자식!!!”

 베벨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레인의 멱살을 쥐었다. 그건 너무나도 당연한 행동이었다.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으로 멱살을 쥔 손을 부르르 떨었다.
 레인의 뒤에 선 기사들이 안절부절 못했다. 일단 궁성에는 아무도 무기를 소지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했거니와, 누가
 봐도 자신들의 주인이 개자식인 것은 사실이었다.
 레인도 이런 상황을 예상하기는 했지만, 생각보다도 목이 아파 인상을 찌푸렸다.
 베벨은 자신이 멱살을 쥐어놓고서 레인보다 더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베벨이 참지 못하겠다는 듯 손에 힘을 줬고,
 신장 차 때문에 주륵 딸려간 레인이 강하게 조이는 목에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고통에 흐윽, 하고 옅은 신음을
 내뱉었다. -멱살을 쥔 베벨의 손에서 힘이 빠진 것은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편해진 목에 레인이 눈을 가늘게 뜨고 놀란 표정을 하고 있는 베벨을 올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베벨이
 더러운 것이라도 만진 양 화들짝 놀라며 물러났다. 미묘하게 불쾌한 표정으로 손을 터는 베벨을 보며 레인의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윌리엄 베벨!!!!”
 “무슨 소란이지?”

 레인이 치를 떨며 어깨에 걸쳐놨던 모포를 바닥에 팽개치며 소리쳤고, 그 후에, 하얀 셔츠 속으로 비치는 레인의 몸을
 본 베벨이 흠칫한 것과 제3자의 목소리가 들린 것은 동시였다.
 레인은 새로 나타난 사람 쪽으로 시선도 돌리지 않은 채로 베벨을 노려보았다. 장갑이 있었다면 그것을 던졌을
 기세였다.
 감히 베벨 따위가 자신에게 더럽다는 표정을 짓다니! 저 따귀를 갈겨주고 침을 뱉어주고, 머리를 밟아주지 않으면
 속이 시원해지지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나타난 사람은 계속 무시해도 좋을 사람은 아니었다.
 불쾌함인지 부끄러움인지 모를 미묘한 표정을 짓던 베벨이 황급히 그를 향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전하!”

 베벨의 입에서 제 3자에 대한 호칭이 불리자 정말로 더 이상은 외면할 수 없었다.
 숨을 몰아쉬며 돌아보자, 거대한 남자가 서 있었다. 남자의 존재감에 레인이 화들짝 놀란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레인 정도는 한 팔로도 들어 올릴 수 있을 만큼 크고 건강해 보이는 남자였다. 레인은 얼굴이 구겨지려는 것을
 필사적으로 막았다.
 자신이 감히 쳐다보지도 못 할 만큼 높은 사람만 아니었다면 당장 머리카락을 잡고 똥물에 쳐 넣고 싶을 만큼 잘생긴
 얼굴이었다. 날카로운 콧날과 반듯한 이마. 차가워 보이는 회색 눈동자. 강인한 턱. 젠틀 해 보이는 황금색
 머리카락은 만월처럼 서늘하게 빛나서 그 커다란 남자를 아름다워 보이게까지 만들었다.
 여자들은 이런 남자를 좋아했다. 게다가 시원시원하게 웃는 것이 바람둥이 같기도 했다. 선수가 선수를 알아본다던가.
 레인은 수도에서 여자를 꼬시는 것이 절대로 쉽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며 무릎을 꿇었다.

 “소란을 일으킨 것이 그대인가, 바네사 레인.”

 고개를 숙인 레인이 엥? 하며 숨을 몰아쉬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자신의 성과 이름을 말했다. 대체 어떻게?
 이미 가증을 떨기 시작한지라 고개를 들고 남자를 바라보는 무례는 면했지만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쉽게 생각이 나지
 않았다.
 숨을 가다듬고 선한 표정을 지은 레인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심기를 불편하게 해드렸다면 부디 자비를.”
 “레인. 일어나.”

 남자가 레인에게 손을 뻗었다. 힐끔, 손을 보자 다시금 레인의 불쾌감이 치솟았다. 커다랗고 단단한 손은 레인의
 콤플렉스를 자극했다. 무시하고 싶었지만, 잡았다. 그 손에는 그가 태자임을 표시하는 반지가 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으켜진 레인을 향해 태자가 말했다.

 “추워 보이는군.”

 괜찮습니다. 라고 대답하려던 레인은 태자가 자신의 앞에서 몸을 숙이는 통에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태자는
 바닥에 떨어진 모포를 주워 움칠하는 그의 어깨에 둘렀다. 태자의 손이 모포를 여미며 목 근처에 닿자, 레인은 알 수
 없는 한기를 느꼈다. 그래도 가면같이 웃고 태자의 친절에 감사를 표하며 몸을 숙였다. 젖은 머리카락에서 떨어진
 물이 카펫 바닥에 떨어진다.
 그 모습에 혀를 찬 태자가 잠시 친절하게 웃더니 레인을 끌어다 안았다.
 레인이 화들짝 놀랐지만 끌어안는 힘은 강했다.

 “저.. 전하.”

 아찔할 정도로 강렬한 남자의 향기가 났다. 레인이 귓가에 닿는 숨에 고개를 저었지만 단단한 가슴은 레인을 풀어주지
 않았다.

 “보고 싶었어. 레인.”

 귓가에 간절하게 속삭여지는 태자의 말에 레인이 호박색 눈을 크게 떴다. 마주쳐 오는 회색눈동자가 어쩐지 익숙했다.

 “.....헬? 사왕자?”

 레인이 깊숙한 기억의 저편에서 오래된 이름을 꺼내자 태자가 더 짙게 미소 지으며 낮게 대답했다.

 “그래.”
 “사왕자?!!!”

 레인이 태자를 밀어내며 소리쳤다. 아쉬운 듯 손을 턴 태자가 레인의 경악한 모습에 킬킬대며 경박하게 웃었다.
 자신이 농탕질을 하며 타국에 가 있던 동안, 제국에는 무슨 일이 있었나 레인에게 3년은 그렇게 긴 시간이 아니었다.
 너무 짧아서 변한 것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찰나의 시간이었다.
 레인은 지금,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눈앞에 남자에게선 자신이 익히 알던 어리고 작은 소년의 모습이 전혀
 없었다. 남아있는 것은 금욕스러운 금발과 회색의 눈동자뿐. 그나마도 느낌이 전혀 달랐다.
 기가 막히는군, 이라는 말은 속으로 삼켰다. 믿을 수 없었다. 소년이 남자가 되는 것은 익히 있는 일이지만, 이것은
 ..... 정말로 예상하지 못했다.
 게다가 사(四)왕자가 태자라니. 제국은 장자가 무조건 왕으로 추대된다. 심지어 그가 정박아여도 남자이기만 하다면
 왕이 된다. 하지만 사왕자가 태자가 되었다는 것은 무얼 말하는가. 그의 형들의 죽음. 그 외에는 도리가 없을 텐데.
 정말로 제국에는 무슨 일이 있던 것일까. 정세에 무관심했던 것이 심했다.
 불쾌한 기운이 레인을 휩쓸었다. 질투심에 심장이 뛰었다. 레인의 창백하게 질린 얼굴은 그저 굳어 있었지만
 마음속으로는 불길이 치솟았다.
 저 큰 키. 단단한 근육. 강인한 다리. 거만하게 내리깔며 사람을 보는 눈. 지배자의 기운. 모두가 레인이 간절히
 원하던 것이었다. 그딴 비실거리는 꼬맹이가 가지게 될 것이라고는 추오도 생각하지 않았다.
 모포 속으로 숨긴 레인의 주먹이 하얗게 되도록 쥐어졌다. 얼굴이 질투로 추악하게 일그러지지 않게 이를 악문다.
 그리고는 웃었다. 눈 꼬리가 가늘게 흔들렸다.
 레인의 그런 것을 전혀 모르는 듯, 태자가 싱글거렸다.

 “그대 소식은 내 틈틈이 전해 듣고 있었지. 어떤가? 제르바는 있을 만하던가?”
 “......예, 전하.”

 소담스레 웃은 레인이 대답했다. 수줍은 듯 고개를 숙이고 숨을 조용히 몰아쉬었다. 이윽고 고개를 들었을 때는, 그
 얼굴에 티끌하나 보이지 않았다. 속은 추한 질투심으로 끓어오르고 있었지만 그건 아주 조금도 드러나지 않았다.
 환하게 웃는 레인을 태자가 묘한 눈으로 바라본다. 그러더니 물었다.

 “3년 만에 돌아온 제국은 어떻지? 크고 강대해 졌는가?”

 칭찬을 바라는 어린애 같은 발언이다. 성격 나쁜 레인이 속으로 궁시렁 거렸다. 덩치는 산만한 게 꼭 4살배기 꼬마
 같구나. -하고 이죽대며 눈을 반짝였다. 조금 상기된 얼굴로 존경스럽다는 듯 바라봐 주었다.

 “예, 전하. 감탄스러울 정도로-. 이곳에 오는 동안 모든 백성이 전하를 찬양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레인의 말에 태자가 크극, 하고 미친 사람처럼 웃었다.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태자의 웃음소리에 레인이 숨을 죽였다.
 회색 눈은 기묘하게 차가웠다.
 곧 태자가 웃음을 멈추고 묘한 시선으로 레인을 보았다.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에 레인이 남모르게 침을 삼켰다.

 “그대도? 그대의 생각도 그러한가?”
 “저 역시 전하의 백성입니다. 그 누가 위대한 핏줄 앞에 경애를 표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소인은 3년 전과 한 치도
 다름없이 위대한 왕가만을 찬양합니다.”

 오물오물 말하는 레인은 조금 쑥스러워 보였다. 옆에서 그를 보는 베벨의 입가가 역겹다는 듯 씰룩였다. 그래도
 사실은 놀라울 정도로 자연스럽다.
 태자의 손이 고개 숙인 레인의 볼에 닿았다. 레인은 하마터면 가증을 떨던 것도 잊고 그 손을 뿌리칠 뻔 했다. 간신히
 숨을 몰아쉬며 참았지만 움칠 하는 것만은 숨길 수 없었다. 끈적거리는 시선과 손길에 떨떠름하게 웃은 레인이
 수줍어서 그런 척 뒤로 물러섰다.
 태자가 회색 눈동자를 지긋이 들어 말했다.

 “여전히 그대는.... 아름답고, 선량하고 다정하구나.”
 “....감사합니다. 전하.”

 끈질기게 쫒아 와 볼을 어루만지는 뜨거운 손길에 레인이 필사적으로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심장이 펄덕펄덕 뛰었다.
 절대로 좋은 기분이어서가 아니었다.
 단단한 손길이 참기 힘들만큼 싫었다. 3년 전만 같았어도 자연스럽게 피할 수 있는 손이지만 지금은 무슨 수를 써도,
 권력을 움켜진 이 손을 피할 수 없다. 어린아이와의 팔씨름에서 진 듯한 느낌이다. 창자가 꼬이는 듯한 굴욕감.
 빗물에 차가워진 턱에 닿은 따뜻한 손은 등줄기를 잡아채는 것 같이 소름 끼친다. 레인이 슬며시 좀 더 뒷걸음질
 치려고 하자, 목까지 내려온 손이 경동맥을 지그시 눌렀다. 레인의 가는 목은 태자의 한손에 움켜쥐어지고도 남았다.

 “전하, 폐하께서 기다리십니다.”

 레인이 놀라 숨을 들이켰을 때, 태자의 뒤에 서 있던 남자가 말했다. 어쩐지 조금 말리는 듯한 음성이었다.
 음, 하고 대답한 태자가 레인의 목을 놓았다. 그리고는 레인을 훑어보곤 옆으로 스쳐지나갔다. 그의 뒤에 서 있던
 시종들이 물처럼 갈라져 레인의 양 옆을 지나쳤고, 한참이 지난 후에야 레인이 숨을 턱 놓았다. 곧 휘청였다. 물러 서
 있던 기사가 재빨리 달려와 부축하지 않았다면 바닥에 꼴사납게 쓰러질 뻔하였다.

 “망할.”

 태자의 위압감 속에서 벗어난 레인이 이를 아득, 갈았다. 자신을 부축한 기사를 옆으로 밀치고 꼿꼿이 서서 태자가
 사라진 곳을 노려보았다.
 분명 정다운 대화를 나누었다. 하지만 발목을 틀어쥐는 것은 굴욕감이었다. 왕가의 피를 이었다는 것 외에는
 마구간지기보다 못했던 저 놈이. 대체 어떻게-.
 치솟는 시기심에 뱉어내는 숨이 뜨겁다. 남 잘되는 꼴을 보느니 같이 끌어내려 주는 것이 옳았다. 비틀린 레인의
 마음은 풀릴 줄 몰랐다. 자신이 3년간 제르바에 가지 않았다면, 이렇게 되기 전에 수를 쓰든가 도움을 줘서 생색을
 내던가 했을텐데.
 괜스레 분해서 이를 갈며 숨을 몰아쉰다.
 자리를 털고 일어난 베벨이 옆에서 멍청하게 말을 걸었다.

 “전하와 친한가, 자네?”
 “.....윌리엄 베벨.”

 레인이 짜증난다는 듯이 그를 불렀다. 그리고는 숨을 내 쉬었다. 눈을 길게 내리깔고 차갑게 바라본다.

 “다시 한 번 아까 같은 시선으로 날 보면, 그땐 자네의 그 쓸모없는 눈알을 대신 뽑아주겠네.”

 원한은 절대로 잊지 않는 레인이 태자 때문에 하지 못했던 말을 씹어 뱉어냈다.
 베벨이 조금 찔리는 듯 입을 다물었고, 곧 불쾌한 표정이 되었다. 그런 그를 차갑게 노려본 레인이 고개를 돌려
 태자와 반대 방향으로 걸었다.
 친하냐고? 물론 그랬다. 베벨 뿐 아니라, 태자도 그리 믿고 있어야만 했다. 레인에게는, 지나가는 시종의 정강이를
 걷어차며 화풀이를 해야 했을 정도로 끔찍한 만남이었다 해도 말이다.




 4.


 “기분 좋으십니까?”

 몹시 빈정대는 어투로 물은 것은 태자의 심복인 마빈이었다. 좋냐? 응, 좋아? -라고 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사람 좋게 웃은 태자가 음, 그래. 하고 대답했다.
 마빈이 ‘좋단다..’ 하고 궁시렁 댔지만 태자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방금 자신이 태자를 말리지 않았다면, 그는
 분명 레인의 목을 졸랐을 터였다. 그리곤 그 탐스러운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아무 곳에나 끌고 들어가 그를 범했을
 것이다.
 입술을 핥는 것을 보면, 그리 하지 못한 것에 대해 약간은 아쉬워하고 있었다.
 태자는 레인이 제국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은 뒤부터 제정신이 아니었다. 원래도 썩 제정신인 것 같지는 않았지만,
 지금은 유독 심했다.
 아니, 정말 더 심한가? 마빈은 잠시, 태자가 레인 때문에 미친 것인지, 아니면 원래 미쳤는데 사랑에 빠져서 더 정신
 나가 보이는 것인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했다. 자꾸 후자 쪽으로 생각이 기우는 듯해서 애꿎은 손톱을 물어뜯었다.
 자신의 인생 전반에 후회가 들것 같아 고개를 흔들며 생각을 지웠다.
 복도를 지나 구름다리로 접어들자 태자가 아련한 듯 이야기했다. 어울리지 않게 꿈꾸는 소녀 같은 투다.

 “정말 아름답더군. 3년 전보다도 더. 마빈, 그렇지 않나?”
 “아, 소인은 잘 모르겠습니다.”

 마빈의 재빠른 대꾸에 걸어가던 태자가 멈추어 섰다.

 “뭐, 별로 그대를 경계해서 하는 말은 아니네.”

 마빈이 질렸다는 표정으로 ‘퍽이나 그러시겠습니다.’ 하고 이죽댔다. 그를 향해 생글생글 웃어준 태자가 다시
 앞으로 걸어갔다.
 바네사 레인. 마빈이 태자의 옆에서 업무를 수행하는 중에 가장 많이들은 이름이었다. 매우 아름답다는 것은
 인정하나, 그보다 더 심한 개차반이라는 것도 마빈은 알고 있었다.
 구름다리를 다 지날 즈음에, 태자를 힐끔 보고 한숨을 내 쉰 마빈이 피곤한 듯한 음성으로 물었다.

 “......정말 그렇게 하실 겁니까?”
 “누가 감히 나를 저지 할 수 있지? 그대인가, 마빈?”
 “.....제가 어찌.”

 태자의 무심한 말에 마빈이 속으로 혀를 찼다.
 시키면 시키는 데로 해야 하는 뒷바라지 인생이지만 마빈은 썩 찬성하기 어려웠다. 자신이 지금까지 조사해온 레인의
 성질머리가 태자의 광인 기질을 만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생각만 해도 머리카락이 옴팡 빠지는 기분이었다.
 갑자기 위가 저릿저릿 해 오는 것을 느끼며 태자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래, 어쩌면 지금 태자의 행동이 최선일지도
 몰랐다. 설득과 끈기로 레인을 교화시킬 수 있다는 것은 귀여운 헛소리지. 그래. 저러는 것이 최선일거야, - 라고
 마빈은 스스로를 설득하려 애썼다. 어느 정도 사실이기도 했다.
 마빈은 윗배를 움켜잡으며 진정하려고 애썼다. 아직 벌어지지 않은 미래의 일을 걱정하기엔 지금 당장도 바쁘다.
 태자가 무슨 생각인지 구름다리 아래를 노려보고 있다. 어쩐지 웃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설마 하는 기분으로
 구름다리를 내려다보자, 가장 아래쪽 복도에서, 옷도 갈아입지 않은 레인이 시녀 하나를 붙잡고 시시덕대고 있다.
 저런-. 아주 못을 박는구나.
 쯔쯧. 혀를 찬 마빈이 ‘그게 네 운명인가 보다.’ 고 생각하며 태자를 따라 아래를 기웃대는 시종들의 정렬 상태를
 점검했다. 마빈의 재촉에 고개를 든 태자는 몹시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다. 마빈은 괜스레 한기를 느끼며 고개를
 저었다.



 * * *



 낮 동안 승전보고 행사가 끝난 뒤 저녁부터 거창한 파티가 시작되었다. 파티를 위해서인 양 비는 어느새 그쳐 있었다.
 겨울이 가까워 와 금세 어두워진 하늘은 반짝이는 별들과 음악소리와 어울려 로맨틱한 축제 분위기를 자아낸다.
 별빛이 그대로 쏟아지는 그의 방 커튼 아래에서 레인이 혀를 찼다.

 “그래서, 안나양은 혼전 순결이 중요하다고 여긴단 말입니까?”

 그렇게 말하는 레인은, 꼭 ‘세상에, 이런 일이!’하는 투였다. 하긴, 레인의 손에 가슴과 허리를 잡힌 채, 혼전순결
 운운하는 것은 기가 막힐 노릇이긴 했다.
 레인의 품에 안긴 안나라는 레이디는 이제 갓 열다섯이 넘었을까 싶을 만치 어렸다. 아직 무르익지 않아 가슴이며
 엉덩이며 별 굴곡은 없었지만 반반한 것이 크면 꽤나 미인이 될 것 같은 소녀였다. 물론, 레인의 손을 필사적으로
 피하며 부끄러워하는 지금도 충분히 귀여웠다.
 아쉬운 듯 입술을 핥은 레인이 흐응, 하고 혀를 차며 물었다.

 “교회 다니시는지?”
 “아.. 그야, 물론. 당신은 아니신가요?”
 “아, 저도 아주 충실한 신의 종이랍니다.”

 안나의 가슴에서 손을 뗀 레인이 두 손을 맞잡고 허공을 보며 희극적으로 말했다.
 실제로 레인은 어울리지 않게도, 교회에 나가는 것을 좋아했다. 좋아하는 일을 손으로 꼽으라면 꽤나 앞자리에 들어갈
 정도였다.
 일단, 교회에 갈 때마다 입는 까만 옷들이 좋았다. 그리고 사교파티장과 맞먹을 정도로 여자가 많다는 점도 좋았다.
 검은 정장을 멋지게 차려입고 엄숙한 표정을 한 채 성서 밑으로 옆 자리에 앉은 여자의 다리 밑을 지분거리면
 평소보다 짜릿했다.
 가장 결정적인 것은, 레인은 고해성사를 몹시 좋아했다는 것이다. 별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자신이 일주일간
 저지른 나쁜 행동들을 고백하는 것이 못 말리게 즐거웠다. 순진한 신부를 희롱하게 된다는 면도 그렇지만, 도둑질한
 일을 자랑하는 어린아이처럼 괜히 우쭐해진다는 것이 정말 좋았다.
 능청스럽게 기도하는 시늉을 하는 레인을 보며 안나가 깔깔 웃었다.

 “충실한 신의 종 치고는 너무 음탕한걸요?”
 “오, 안나. 신의 종은 원래 음탕하답니다. 절제가 신의 뜻이라고 말하는 것은 우매한 자들의 말이지요. 신께서 만든
 자연의 섭리란 얼마나 위대한지! 성적 욕구가 나쁜 것이라면 처음부터 우리에게 그것은 주어지지 않았을 겁니다.
 태초에 우리는 얼마나 음란하고 무절제했는지, 성서를 읽어보셨을 테니 아시겠지요? 성적 욕구는 태초부터 있어왔고,
 부끄러움과... 이런 딱딱한 자기방어는 낙원에서 쫒겨난 선조에게 내려진 벌이며 오욕이죠.”

 청산유수로 내뱉는 레인은 상당히 부드럽고 유식해 보였다. 반신반의한 눈으로 고개를 갸웃하는 안나에게 레인이 말을
 이었다. 슬쩍 뻗은 손으로 그녀를 따뜻하게 안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제가 하는 말이 모두, 처음 듣는 말인가요? 아직도 혼전순결과 금욕이 중요하게 생각되나요? 성서를 바라보는
 인간의 눈이 얼마나 오만한 편견에 사로잡혀있는가, 에 대한 예는 수도 없이 많답니다. 하물며, 성서에는 성교하지
 말라는 말은 한 구절도 나오지 않죠. 적혀있는 글귀조차 곡해해 보는 불경한 피조물이 그 외에 것들을 볼 때는 얼마나
 제멋대로일지 생각하면 속이 울렁일 지경이에요. 게다가 안나, 사랑하라고 부르짖는 성서의 구절들을 떠올려 보세요.
 당신은 성서를 어떻게 해석할 건가요? 한번 입을 맞추었다고 당신이 새까맣게 변할 거라고 할 셈인가요? 이렇게, 나와
 당신이 지키고자 하는 많은 것들은 신께는 하잘것없는 껍질에 불과할 텐데...”
 “앗... 간지러워요.”
 “당신이 조금 일찍 어른이 된다고 해도, 그게 죄가 될 리 없지요. 선량한 안나, 누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레인이 안나의 아랫입술을 살포시 빨았다. 눈을 가늘게 하고 웃는 레인은 몹시 요염하고 아름다워서 안나는 얼굴을
 붉혔다.
 안나는 사실 뭔가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언니들에게 은밀히 들었던 그런 일들이 자신에게 벌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이런 경험에 대해 이야기 하며 잘난척하던 언니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섹스니 성교니 하는 부끄러운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고, 성서와 신을 들먹이는 레인은 굉장히 어른스러워보였고
 믿음직해 보였다. 게다가 자신의 주근깨 가득한 얼굴이 민망할 정도로 아름다운 레인이 자신을 찬양하는 데야, 기분이
 나쁠 리 없었다. 저렇게 상냥하게 웃는데, 자신에게 해가 될 일을 할 것 같지는 않았다.
 레인의 손을 뿌리치는 안나의 몸부림이 점점 약해졌다. 알고서 하는 것은 아닐 텐데도, 여자의 본능인지 그 몸짓이
 점점 유혹과 닮아갔다.
 밀어내던 손이 레인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아....”

 레인의 동작 하나 하나가 기분이 좋았다. 성적 쾌감이라기보다는 우쭐하게 만드는 뭔가가 있었다. 금기를 범한다고
 생각하자, 자신이 대단한 사람인 것 같고 또래의 어떤 애들보다 어른스러운 것 같았다. 레인이 그녀의 몸에
 키스하느라 더디게 굴자 안나가 오히려 조급하게 굴었다. 티 나지 않게 엉덩이를 흔들고 치마를 올렸다.
 레인이 낮게 웃었지만 안나는, 처음 남자의 손이 들어온 은밀한 곳의 감각 때문에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자신의
 손으로 자위 할 때와는 전혀 다른 감각이 그녀의 팔에 작은 소름을 돋게 했다.
 숨을 몰아쉬는 안나를 보며 레인이 짓궂게 웃었다. 빠르게 등에 단추를 풀러 옷을 내리고 허리에 이를 세웠다. 하얀
 옆구리에 붉은 자국을 만들자 안나가 바르르 떨었다. 혀로 핥자 간지럽다며 깔깔댔다. 완전히 넘어 온 이 어린
 아가씨와 어떤 체위로 즐겨볼까를 고민하던 찰나, 벌컥 문이 열렸다.

 “도련님! 연미복이..!”
 “꺅!”

 안나가 비명을 지르며 레인의 손을 뿌리쳤다. 새빨갛게 된 얼굴을 치마폭에 숨기며 ‘난 몰라!’ 를 남발했다. 하얀
 가슴이 두 팔사이로 사라졌다.
 레인이 망연한 표정으로 안나에게 맞아 붉게 된 손을 허공에 멈추었다.
 다된 밥에 코를 빠뜨려도 유분수지.... 기가 막혔다.

 “아.. 앗.. 저, 그게...”
 “그, 그럼 다음에..!”

 도련님을 찾으며 들어온 남자가 우물거리는 사이, 안나가 얼굴을 가리고 옷을 여미며 후다닥 방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 뒷모습을 본 레인이 인상을 찡그렸다.
 이게 웬 엿 같은 일이란 말인가! 근간에만 이런 일이 몇 번짼지, 이건 정말 농담이 아니었다. 여자의 아버지가 쳐들어
 와도 ‘같이 하자’며 웃을 레인의 도덕 관념상, 아랫것들의 눈 때문에 섹스를 멈춘다는 것은 용납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한껏 쫄아 있는 남자에게 유리잔을 집어 던졌다. 잔은 남자의 머리 옆을 스쳐 벽에 부딪혀 박살났다. 다리를 후들후들
 떤 남자가 주저앉았고 셔츠 단추를 잠그며 레인이 천천히 그 앞에 섰다. 그리곤 깨진 조각 중에 가장 크고 날카로운
 것을 집어 그의 입술에 가져다 댔다.

 “나쁜 소식이라면, 네 혀를 자르지.”

 남자가 반색하며 입을 열었고, 레인이 조금 아쉬움의 입맛을 다셨다.

 “도련님, 도련님의 연미복이 모두 젖어서 당장 오늘 저녁 파티에 입으실 것이 준비되지 못했잖습니까?”
 “음, 그랬지.”

 쏟아지는 비는 마차 아래 칸에 넣어뒀던 옷가지들까지 젖게 만들었다. 멍청한 시종들을 닦달해 봤자, 젖은 옷이
 갑자기 마를 리 없었기에 조용히 넘어갔지만 시종들은 나름 긴장했던 듯싶었다. 파티는 하루만 열리는 것이 아니니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었지만 개차반인 주인이 조용하니, 오죽 폭풍전야 같았으랴.
 시종이 정말 기쁘다는 표정을 지었다.

 “누군가 그 사정을 알았는지, 도련님께 연미복을 보내오셨습니다! 아마도 도련님을 사모하는 귀부인의...”
 “그만. 입 닥치고 어서 가져오기나 해.”

 레인의 말에 후다닥 일어난 시종이 복도 끝에 숨어 있는 사람들을 향해 손짓했다. 레인에게 말을 한 시종은 제비를
 잘못 뽑아 대표로 나온 것이었다. 손짓에 시종들이 잔뜩 쫄은 얼굴로 나왔다.
 레인이 가늘게 뜬 눈으로 그들을 훑어보곤 방으로 들어가자 모두 안도의 숨을 내 쉬고 따라 들어갔다.
 아름답게 장식된 커다란 금속 상자의 안에는 작은 카드와 함께 감색 연미복이 들어있었다.

 -친애하는 레인.
 당신이 입어주신다면 기쁠 것 같습니다. -

 발신자는 표시되어 있지 않았다. 흐응, 하고 한참이나 카드를 들여다보던 레인이 카드를 구겨 바닥에 던지고 셔츠
 단추를 푸르기 시작했다. 곧 하얗고 아름다운 몸이 드러났고, 시종들이 익숙하게 그의 몸에 옷을 입혔다. 옷은 자로
 잰 듯 정확하게 레인의 몸에 들어맞았다. 레인의 높은 골반과 아름다운 등선마저 예상한 듯 정확히 피트 됐다.
 옷은 멋졌고 레인은 더욱 환상적이었다. 천사에게 날개를 달아준 듯 레인의 온 몸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연미복의
 고아한 푸른빛은 레인의 하얀 피부를, 작고 심플한 문양은 레인의 화려함을 돋보이게 했다.
 거울을 본 레인이 조금 흡족한 듯 거만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목에 바네사 가문의 문양이 세공이 된 은색의
 목걸이까지 걸어 준 시종들은, 외모와 정 반대의 성격을 알면서도 감탄의 신음을 뱉을 수밖에 없었다. 가채가 필요
 없는 숱 많은 머리카락을 정돈 하고나자, 파티 시간이 꽤나 지나있었다.
 회중시계를 가슴에 넣은 레인이 파티장을 향했다. 3년 만에 가는 제국의 사교장이니 만큼 레인의 입가의 음흉한
 미소가 가득했다.


 연회석의 붉은 카펫을 밟은 것은 이미 분위기가 무르익은 뒤였다.
 홀에 문이 열리고 레인이 들어서자, 그가 파티의 주인공인 것 같았다. 음악 소리조차 잠시 멈추었다. 아슬아슬한
 정적이 흐르고, 곧 한숨과 탄성이 터져 나왔다.
 늦은 것이 민망한 듯 약간 상기 된 볼은 손대고 싶을 만큼 투명했고 호박색의 두 눈 끝은 파르르 떨렸다. 천사가
 있다면 저런 느낌이리라. 모두의 심장이 쿵쾅 쿵쾅 뛰었다. 어디선가 ‘오, 신이여.’ 하고 낮게 탄식을 내뱉는
 소리가 들렸다. 모두 동감했다. 같은 신의 피조물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지고한 남자였다, 레인은.
 주변으로 사람들이 몰리자 레인은 지성적이고 순수한 사람인양 조신하게 굴었다. 레인의 외모에 홀린 사람들은 그의
 한마디 한마디에 제 멋대로 감동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레인은 그저 눈을 맹하게 뜨고 조금 모자란 사람처럼 웃었을
 뿐인데, 다들 그가 천사의 화신인양 떠받들었다.
 바네사 백작의 기대처럼, 레인이 자신의 성을 밝히자, 사람들은 크게 놀라 술렁였다. 콩 심은 데 콩이 아닌 팥이 나온
 것과 같았다. 사람들은 조용히, 그 비계 덩어리에서 레인이 나온다는 것이 설득력 있는 주장인가 고민했다.
 레인은 웅성대는 사람들에게 우월감을 느꼈다. 환락여행 차 갔던 제르바에서의 유학을 자랑스럽게 떠벌이고,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연스레 풍기며 몰려든 사람들의 분위기를 리드했다.
 두잔째 와인이 손에 들리고 여자들의 반짝이는 눈이 유혹적으로 변해갈 때 즈음, 누군가의 물음에 레인이 명랑하게
 웃었다.

 “제르바에서는 파티가 끝날 무렵이 되면, 집주인이 옷을 벗죠. 아, 혹은 몸매에 자신이 없는 마담의 경우는, 쇼를
 준비하기도 합니다. 살롱에 무대를 설치하고 창기나 배우를 불러 단막극을 공연하는 거죠. 물론, 성인을 위한
 공연이고, 끝난 뒤에 그것의 문란함에 대해 고지식하게 떠드는 사람은 없습니다.”

 레인의 발언들은 꽤나 대담했다.
 순진한 얼굴과 대조되는 의외성에 사람들은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친밀감을 느꼈다. 레인의 외모는 매우 금욕적으로
 보이지만, 조금만 흐트러뜨리면 색마처럼 음란해 질 거라는 걸 모두 다 알고 있었다. 때문에 음담패설을 싫어하는
 사람조차 이 분위기를 수긍하고 있었다.
 현재 제국에서는 제르바의 문화가 유행하고 있었다. 답답하고 딱딱한 문화에 지친 젊은이들은, 제르바의 음탕하지만
 우아한 맛이 있는 문화에 매료 되고 있던 것이다. 레인의 입에서 나오는 제르바의 문화는 사실보다 좀 더 탐미적인
 경향이 있었다. 원래는 살롱에 공연을 가장한 난교를 벌이는 것은 소수의 젊은 귀족층이 즐기는 저질문화였지만,
 레인의 입에서 이리저리 포장되어 뱉어지는 그것은 은밀하고 고급스러워보였다.
 그런 식으로 한참을 나불대던 레인은 속으로 제국 귀족들을 향해 빈정댔다. 제르바에서는 이쯤 하면, 서로 음란한
 말도 먼저 꺼내주고, 금세 대화의 농도가 짙어지는 맛이 있는데 제국 귀족들은 역시 딱딱했다. 와인으로 목을 축인
 레인이 화두를 던졌다.

 “3년이나 떠나 있었더니, 제국도 많이 변한 듯싶더군요. 원래도 강대했지만, 더 위엄이 넘쳐요. 개혁이 있었다는
 말은 들었지만....”

 레인이 말끝을 흐리자, 주변에서 웅성웅성하고 이야기들이 터져 나왔다. 너도나도 레인에게 말을 걸고 싶어 3년
 전부터 지금까지 제국의 대소사를 줄줄이 내뱉었다. 세계에서 가장 강대한 제국의 최고 귀족들 치고는 미련하고
 순박했다. 제르바의 시골 귀족도 이렇게 순진하지는 않았다. 제르바로 다시 돌아갈까, 하는 마음이 잠시 들었지만, 곧
 들리는 말에 생각은 끊겼다.

 “태자 전하 성품이.... 조금 특이하시긴 하죠. 아, 뭐 그래서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만, 요즘은 유난한가보더군요.”
 “아, 당통경도 그 이야길 들었나보구료. 어째 난 좀 무섭던데...”

 바로 옆에서 들리는 갈색머리의 키가 작은 남자의 말에, 레인이 흥미를 표했다. 남자가 주변을 둘러보곤 굉장한
 비밀이라도 전하듯 입을 열었다.

 “전하께 결벽증이 있다는 말 들었나?”
 “결벽증?”

 레인은 3년전에 보았던 태자의 모습을 떠올렸다. 결벽증은커녕, 위생관념도 그다지 탁월한 것 같지는 않았다.

 “고지식하신 건지, 다른 일 처리를 보면 꼭 그런 것 같지도 않은데. 사생활에 관해서는 유별나신가 보더군. 이번에
 로렌코 자작의 둘째 아들이, 좀 난잡하게 놀다가 태자 전하 눈 밖에 나지 않았겠는가.”

 레인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뭐 어쨌다는 건가, 하는 불만족스러움에 와인으로 입술을 축이자 남자가 숨을 죽이며
 꺼림칙하다는 듯이 내뱉었다.

 “거세 시켰다는군.”

 입에 머금었던 와인을 뿜을 뻔 했다. 레인의 반응에 흥이 난 남자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뭐, 법이 일부일처제라지만, 그런 고리타분한 것을 누가 지키겠나? 여자들도 그런 거 따지는 남자 싫어한다구. 그런
 남자는 아량이 없다고 놀림이나 받지.”

 레인이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태자라는 직업이 그렇게 할일이 없는 건지 몰랐다. 제 사생활만 깨끗하면 됐지, 남의
 물건 관리까지 해줄 정도로 오지랖이 넓었던가. 레인의 머릿속에는 정말로 제르바로 돌아가 버릴까 하는 생각이
 지속적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아니면, 새로 속국으로 만들었다는 카이저도 나쁘지 않았다. 그 쪽 여자들은 예쁘진
 않아도 화끈했다. 아직 전쟁 직후라 환경이 열악할 테지만, 거친 환경 속에서 거친 섹스라면 퍽 자극적일 터였다.
 레인이 입맛을 다시는 찰나, 문 쪽에서 거한 소리가 들리고 태자가 입장했다.
 가장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의 등장에 레인의 입가가 씰룩였다. 음악도 멈추고 모두가 무릎을 굽혀 그를 맞이했다.
 아니꼽고 더러운 기분으로 레인도 몸을 숙였다.



 홀에 들어온 태자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레인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새까만 머리카락이 불빛에 유난히도
 반짝였기 때문이다.
 태자가 낮게 웃자, 그 뒤에 선 마빈이 입을 삐죽 내밀며 투덜댔다.
 주변은 고요했다. 모두 태자의 움직임에 숨을 죽였다. 황제가 살아있지만, 정말 무서운 것은 태자였다. 제국의 모든
 권력과 군은 태자의 손아래 놀고 있었다. 그가 넓힌 땅의 크기는, 제국의 원래 영토보다 커졌다. 그저 서 있는
 것만으로도 카리스마가 넘쳤다. 강인한 두 어깨에 짊어진 기운은 소름끼칠 만큼 위압적이었다. -태자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제왕의 기질을 타고난 남자였다.
 모든 왕자들을 제치고 그가 태자가 되었을 때는, 모두가 회의적이었다. 이런 패악한 방식으로 왕이 된 사람은
 없노라고. 모두가 입을 모았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모두가 인형처럼 그를 찬양했다.
 태자가 레인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고개 숙인 레인은 시선을 느끼지 못한 듯 못마땅한 표정으로 땅을 보고 있었다.
 마빈이 뒤에서 낮게 ‘전하! 전하!’ 하고 불렀지만 태자는 작정한 사람처럼 휘적휘적 레인에게로 걸어갔다. 마빈의
 통통한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원래는 연회장 끝, 커튼 뒤에 있을 황제에게 먼저 다가가 인사해야 했다. 마빈의
 음성이 다급해졌고, 뒤를 따르는 시종 중 몇도 그 목소리를 듣게 됐을 때 즈음, 태자가 우뚝. 걸음을 멈췄다.

 “마빈. 시끄러워.”

 태자의 말에 마빈이 입을 쩍 벌렸다. 태자는 기분 좋게 웃고 있었다. 연회장에 들어오기 전부터 이렇게 하리라 이미
 생각하고 있던 게 분명했다. 태자가 한번 마음먹으면 절대로 말릴 수 없다는 것을 상기한 마빈은 이마를 짚으며
 물러섰고 태자는 동네 건달처럼 어슬렁거리며 걸어 레인 앞에 섰다.
 갑자기 생긴 그늘에 레인이 고개를 들었고, 아름다운 눈을 크게 떴다. 어리둥절해하는 표정에 태자가 입을 실룩여
 웃으며 손을 뻗었다.

 “일어나.”

 레인이 천천히 일어나는 모습은 마치 환상 같았다. 그 부근만 시간이 멈추어있는 것 같았다. 여전히 의뭉스러운
 표정인 레인에게, 태자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레인. 그대에게 춤을 한곡 신청할까 하는데.”

 사람들이 웅성대는 소리가 파티장을 휩쓸었다. 레인의 얼굴이 당황으로 새빨갛게 붉어졌다. 그 눈에 수치심이 언뜻
 스쳤다. 어깨가 가늘게 떨렸고 곧 떨떠름하게 웃었다. 붉은 입술이 움직였다.

 “소인은 여성의 스텝은 모릅니다. 전하의 발을 밟을까 두렵군요.”
 “내가 알아.”

 더 이상의 거절은 용서치 않겠다는 듯, 가볍게 말한 태자가 레인의 손을 잡고 홀 중앙으로 이끌었다. 음악이 다시
 시작되고 꿇어앉았던 사람들이 일어나 자리를 비켰다.
 경쾌한 음악은 왈츠.
 태자의 손을 잡은 레인의 손이 황공하다는 듯 덜덜 떨렸다.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비치는 귓불과 목덜미가 붉었다.
 커다랗고 아름다운 눈은 가늘게 경련하고 있었다.
 모두의 우려와는 달리 태자는 정말로 여자의 스텝을 무리 없이 밟았다. 태자가 평균보다 큰 신장이기에 레인이
 외소해 보인 것은 당연했다. 그래도 아름다운 두 남자의 춤은 전혀 위화감이 없었다. 남녀의 역할이 바뀐 것 같기는
 했지만, 어떤 여성보다 아름다운 레인과, 어떤 남성보다 멋진 태자기에 그것마저 신선했다. 오늘 밤 이후로는 남자
 스텝을 연습하는 레이디와, 여자 스텝을 외우는 신사가 늘어날 것이 분명했다.
 태자가 레인의 표정을 힐끔 보며 목 안쪽으로 웃었다. 수줍은 듯 보이지만 사실은 수치심과 분함에 뒤로 넘어갈
 정도로 성질이 나 있었다는 것을 어쩐지 알 수 있었다. 아마도 속으로는 태자를 찢어발기는 상상을 하고 있을 터였다.
 태자는 레인의 얼굴 위에 얇은 가면을 싫어했다. 어릴 적에는 저 가면에 깜빡깜빡 잘도 속아 넘어가 병신이 되곤
 했었다. 예쁘긴 하지만 아무데서나 살랑댄다는 점도 미웠다. 어떡하면 레인이 고 나쁜 성질을 드러내며 으르렁
 거릴까? 여기서 눕히고 옷을 벗기고 괴롭히며 범하면 저 가면이 깨질까? - 하는 변태적인 상상을 하며 입맛을 다셨다.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태자를 향해 레인이 소담스레 웃는다. 속으로는 ‘침이나 닦으시지, 변태 마마.’ 하고
 생각했겠지만 입술은 결백하고 눈은 상냥했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음악이 끝났다. 맞잡은 손을 놓아야 했다. 태자는 ‘놓지 말고 끌고 나갈까’를 잠시
 고민했지만, 레인이 타이밍 좋게 먼저 손을 놓았다. 태자가 아쉽게 웃었고 둘이 서로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하, 하고 지친 숨을 내 쉬는 레인을 보며 태자는 가늘게 눈을 뜨고 웃었다. 그의 회색 눈이 비열하게 빛났다.
 태자가 왕이 있을 커튼 뒤로 걸음을 옮기자 잠시 사이에 10년은 늙은 듯한 마빈이 터덜터덜 걸어 뒤를 따랐다.
 태자가 궁시렁 대며 욕을 하는 마빈을 불렀다.

 “마빈.”
 “예, 전하.”

 왜 부르십니까? 저따위가 전하 주변을 알짱거린다는 걸, 알고는 계셨군요? 라고 빈정대려던 입을 다물며 마빈이 숨을
 죽였다. 태자의 눈에 일렁이는 것이 심상찮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조금도 더는 못 기다리겠군.”

 마빈이 고개를 숙이며 “충성을.”하고 대답하자, 태자가 낮게 웃으며 왕이 있는 방에 커튼을 열었다.
 어차피 시간은 문제가 아니었다.
 마빈은 환하게 빛나는 아름다운 만월을 보며 아무것도 모른 채 뒤 돌아 걸어가고 있는 레인을 향해 가슴깊이 애도했다.




 5.


 춤을 신청했던 태자가 뒤로 돌아 서자마자 레인은 이를 악물었다. 최대한 쑥스럽다는 표정을 하고 뒤돌아서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갔다. 굉장했다며 말을 걸어오는 사람들을 향해 일일이 미소 지어주고 커튼 뒤로 돌아 발코니의 문을
 열었다. 후다닥 들어가 슬쩍 문을 닫고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했다.

 “변태 같은 자식!”

 차가운 밤공기를 맞으니, 끓어오르던 피가 조금은 식는 느낌이 들었다.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표정을 구기며 욕지거리를 던질 뻔 했다. 기가 막혀서 ‘지금 제정신이냐?!’ 하고 외쳐주고
 싶은 것을 참느라 혀를 얼마나 씹었는지 모른다.
 레인의 콤플렉스는 한계치만큼 치솟아 있었다. 조금도 여자 같지는 않지만, ‘아름다움’ 이라는 개념이 여자에게만
 국한된다고 믿는 사람들의 엿 같은 편견 때문에 어린 시절에는 속 꽤나 상했던 것이다. 지금은 키도 큰 편이고, 그게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그들을 밟아서고 ‘내가 진짜 남자’ 라는 것을 보여줄 수 있지만, 태자 쪽과 비교 당하고 나니,
 찬물을 뒤집어 쓴 듯했다.
 제국을 떠나 카이저로 떠날 것을 다짐하며 이를 갈다 문득 주변을 둘러보니, 비에 젖은 풀숲 사이에 열정적인
 연인들이 몇 보였다. 아름답게 손질 된 정원, 촉촉하고 싸늘한 공기, 쏟아질듯 반짝이는 별빛 아래에서 사랑을
 나눈다는 것은, 모르는 사람에게는 로맨틱하게 들릴지 몰라도 사실은 조금 촌스럽고 불편한 짓이었다. 성에 방이
 남아도는데, 굳이 저 축축한 곳에서 할 게 뭔가, 하는 생각을 하며 바로 아래 커플을 지켜보았다.
 남자는 잘생기고 몸도 좋아보였다. 허리 놀림을 보니 힘도 넘쳤다. 그에 반해 여자는 가슴도 얼굴도 테크닉도 그저
 그랬지만, 허리로 밀어 올려 진 드레스와 장신구들이 그녀가 그냥 그런 집안 아가씨가 아니라며, 온 몸으로 외쳤다.
 아무래도 남자 쪽이 다른 속셈이 있는 듯 했다. 레인은 저런 놈과 비교하면, 자신은 몸 외엔 아무것도 원하지 않으니
 얼마나 좋은 놈인가. - 하고, 말도 안 되는 자화자찬을 하며 둘의 교합장면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신음을 죽이기 위해 손을 입에 문 여자가 자지러질 만큼 남자의 허리놀림이 속도를 더해갔다. 아까 놓쳐버렸던 안나가
 떠올라 아쉬워진 레인이 둘을 방해하기 위해 와인이라도 쏟아 볼까, 고민하는 사이에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연미복은 꼭 맞는 듯 싶군요.”

 조용한 목소리에 휙 돌아보자, 늘씬한 몸을 고급스러운 드레스로 감싸고 있는 검은 머리카락의 미녀가 와인 잔을
 찰랑이었다. 레인이 여자의 슬퍼 보이는 녹색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조금 술에 취한 듯 보이는 여자가 피식, 실없이 웃었다.

 “하인리히 마리아에요.”

 낯익은 이름이었다. 조금 전 사람들의 입에 태자와 함께 몇 번이나 오르내렸던 이름이었다. 태자와 약혼한 여자라기에
 마침 궁금하던 참이었다.

 “옷은... 마리아양께서?”

 마리아가 비틀거리며 레인에게 걸어가 잔을 건넸다. 확 풍겨오는 술 냄새에 레인이 낮게 웃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면, 그래도 좋아요.”

 본인은 아니지만 대략적인 것은 알고 있다는 말이다. 레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와인을 머금었다. 누가 준 것인지는
 원래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레인에게 지금 중요한 것은, 눈앞에 여자가 방금 전 이를 갈게 했던 태자의 여자이며
 몹시 아름답다는 것이었다. 태자에게 복수하기 위해서라도 먼저 찾아갔을 여자가 잔을 건네며 다가오니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었다.
 술에 취해 늘어지는 여자를 한 팔로 안으며 귓가를 슬며시 쓸었다.

 “많이 취하셨군요.”

 레인의 품에 순순히 안긴 마리아의 눈은 많이 슬퍼보였다. 레인은 뭔가 불안함 같이 어두운 감정의 동요를 느꼈지만,
 품에 안긴 가는 허리에 곧 잊고 말았다. 마리아가 고개를 숙이는 사이에, 와인이 남은 잔은 곧 절정을 맞이할 것같이
 헥헥 대는 커플을 향해 떨어뜨렸다. 등 너머로 들려오는 잔이 깨지는 소리와 숨넘어가는 비명에 레인이 낮게 웃었다.
 쌀쌀한 공기를 느끼며, 그녀를 준비된 룸으로 에스코트 했다.
 마리아의 옷을 벗기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술은 더 이상 필요가 없을 지경이었고, 불이 모두 꺼진
 어두운 침실은 끈적한 공기와 맞물려 농밀한 분위기로 준비되어 있었다. 마리아는 거부하지 않았고, 레인은 묘하게
 쉽다는 생각을 하며 그녀의 옷을 벗기고 입을 맞추고 목덜미를 물었다. 이건 정말, 너무 수월해 재미가 없을 정도였다.
 레인은 마음속 깊이 태자를 조롱했다. 정조 없는 것은 큰 흠도 아니지만, 황비가 될 여자가 이렇게까지 쉬운 것도
 웃겼다. 태자는 허우대만 멀쩡했지, 속빈 강정이라 여자 하나 만족시키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그러나 기뻐서 마리아의 가슴에 키스를 남발하던 레인은 묘한 이질감에 멈칫했다. 가슴을 움켜쥐면 아파서라도 신음을
 내야 할 여자가 무반응이었다. 설마, 자나 싶어서 눈을 마주치니 말똥말똥하게 깨 있었다. 게다가 두려움에 질린
 사람처럼 떨리는 눈동자를 휙휙 굴리고 있었다.
 이건 또 무슨 반응인 건가, 설마 약혼까지 한 여자가 처녀라 첫 섹스를 앞두고 겁에 질린 건가 싶었지만 레인의 손길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걸 보면 그건 아니었다.

 “무슨 생각하십니까?”
 “......”
 “마리아?”

 그제야 마리아는 겁에 질린 시선을 레인 쪽으로 향했다.

 “아니, 아무것도... 그, 그게..”

 횡설수설,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 얼굴로 지껄이는 마리아를 레인이 빤히 바라봤다. 너무 취한 것일까? 마리아의
 상태는 정상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금방이라도 엉엉 울 것 같은 모습에 레인은 기가 막혔다. 이런 여자가 태자의
 약혼녀라니. 너무 어울려서 할 말이 없었다.
 여자를 안을 마음이 완전히 사라져 몸을 일으켰다.
 태자의 여자, 줘도 안 먹는다, 는 쪽도 어디 가서 거만 떨며 말하기에는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정신적인 부분에서는
 포만감이 있다.
 레인이 몸을 일으켜 옷을 추스르자, 마리아가 그의 옷자락을 잡았다. 잡기 싫어 죽겠다는 생각이 고대로 드러난
 표정이었다. 숨기려는 의지가 있기나 한지 궁금했다. 별로 대단하지도 않은 주제에, 자신의 손을 거부하는 작태가
 괘씸하다.
 마리아양. 미안하지만, 별로 내키지 않는군요. 몸매 관리를 좀 더 하시는 것이 어떠신지? - 라고 쏘아주고 싶었지만
 참았다. 여자들의 수다의 위력을 모르는 바가 아니라서, 아직까지는 친절한 이미지로 남고 싶은 레인은 대신 그녀가
 말하기를 기다렸다. 한참이나 주저하던 그녀는 말했다.

 “잠시만. 잠시만, 더 같이 있어주세요.”
 “오, 저런. 둘이서 카드 게임이라도 하자는 말씀입니까?”
 “아, 카드게임! 그래요, 카드라도..”

 잔뜩 빈정대는 레인의 말에 마리아가 절박한 얼굴로 카드를 찾았다. 레인이 황당함에 얼굴을 잔뜩 찌그러졌다.
 마리아의 드러난 뽀얀 가슴이 심하게 덜렁거렸지만 어떤 기분도 동하지 않았다.

 “하, 지금 절 모욕하시려는 겁니까?”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돌아서 나가려고 하자 마리아가 절규를 지르며 그의 다리에 매달렸다.

 “제발 잠시만!”

 강한 힘으로 당겨진 다리에 레인이 휘청했다. 넘어질 뻔 하자 짜증이 벌컥 솟았다. 그렇게나 싫은 표정을 하면서도
 붙잡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대체 왜...”

 왜 붙잡는 겁니까? 하고 물으려던 말은 갑자기 들린 낯선 인기척에 이어지지 못했다. 고개를 돌려 문가를 바라보자,
 누군가가 어둠속에 서 있었다. 마리아가 히익, 하고 놀라며 레인의 다리를 놓고 뒤로 물러섰고 하얗게 질린 그녀의
 표정에 레인이 문가의 사람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누구신지?”
 “...아버지...!”

 목이 막히는 듯 갈라지고 억눌린 목소리로 마리아가 나타난 사람의 정체를 밝혔다. 마리아의 아버지라는 남자는,
 헐벗은 딸을 보고도 소리 지르지 않고 냉정해 보이는 표정으로 레인 쪽으로 다가왔다.
 조금 난감한 기분에 레인은 마리아를 흘겨봤다. 그러게 진작 나갔다면, 이런 면구한 상황은 맞이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하다가 걸린 것이라면 좀 덜 억울할 텐데, 벗겨놓고 그냥 나갈 상황이었던지라 속이 쓰렸다. 흘겨 본 마리아는
 벌벌벌 떠느라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아버지가 그렇게 무서운데 하자고 달려들긴 왜 달려드나.
 마리아의 아버지는 마리아를 보며 수트의 안쪽으로 손을 넣었다. 비장하기까지 한 남자의 표정에 살짝 쫄은 레인이
 애꿎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어떻게 하면 ‘아, 저는 이만.’-하며 자연스럽게 나갈 수 있을지 노란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그리고 일이 벌어진 것은 순식간이었다. 가슴 속에서 서슬 퍼런 칼을 빼든 남자가 꺽꺽, 하고 숨넘어가는 비명을
 지르는 마리아의 가슴을 눈 깜짝 하는 사이에 베어 버렸다. 레인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채 알기도 전에 붉은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이게 무슨 희대의 난극인가. 아버지가 딸을 찌른 것이다.
 바지로 잔뜩 튄 피에 눈을 크게 뜬 레인이 뒷걸음질 치다, 쿠당, 자빠졌다. 헐떡이는 마리아의 비명소리와 피칠을 한
 손을 벌벌 떠는 그녀의 아버지 사이에서 레인은 바짝 마른입으로 꼴깍 꼴깍 침만 삼켰다.

 “미, 미친....”

 레인의 새파랗게 질린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마리아를 찌른 남자는 언제부턴가 울고 있었다. 일그러진 얼굴로 점점
 다가오는 남자에게 레인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웃어보였다. 제 딸년도 찌른 놈에게 미모가 통할 리 없었지만,
 풀린 다리로 도망도 못가는 그로서는 그것이 최선이었다.

 “무, 무슨.. 생각하시는지는 알겠는데, 나와 그녀는 아무 일도 없...힉!”

 딱딱하게 굳는 혀를 움직여 말을 하던 레인의 팔이 그 축축한 손에 잡혀 끌어당겨졌다. 피가 몸에 묻자 레인은
 경련하듯 몸을 뒤틀며 고개를 돌렸고 손바닥에 닿는 차가운 금속의 기운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피에 젖은 칼이
 달빛을 받아 반짝였다. 그것이 신호라도 되는 양 남자가 칼에 몸을 날렸다. 푸욱, 하고 잔인한 소리가 어둠을
 진동시켰다.
 여우 울음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칼날은 어느새 남자의 피와 살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졸지에 레인은 남자의 자살을 돕는 꼴이 되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남자의 갈비뼈 아래를 찌르게 된 것이었다.
 레인은 남자와 눈이 마주치자 가늘게 경련했다. 툭툭, 피가 떨어지는 소리는 비현실적이리만큼 선명했다. 사람의 살을
 파고드는 금속의 느낌이 생생하게 동맥을 타고 올라와 칼을 잡은 레인의 손이 학질 환자의 그것처럼 사정없이 떨렸다.
 딱딱딱, 이가 공포와 추위에 맞부딪혔다고 눈에서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곧 남자가 강한 힘으로 자신의 가슴에
 박힌 칼을 뽑았고 레인의 얼굴과 가슴에 진득하고 붉은 튀가 흠뻑 튀었다. 칼을 뽑은 남자가 쿵, 하고 큰 소리를 내며
 옆으로 쓰려졌다.
 뜨끈한 피로 뒤덮인 손을 덜덜 떨며 셔츠 자락에 닦았지만, 손은 깨끗해지지 않고 옷자락만 더러워졌다. 공포에 질린
 레인의 눈에 신경질적인 눈물이 줄줄 흘렀다. 피비린내에 뇌가 진탕되었다.
 방을 빠져나가기 위해 휘청 이는 다리를 움직이자, 철컹하고 발끝에 칼이 차였다. 비틀하며 주춤하자 발밑에서 피를
 토하며 바들바들 떨던 남자가 레인의 발목을 잡았다. 남자는 곧 죽을 것 같았다. 피를 토하는 남자의 숨이, 가늘게
 흔들렸다. 하얀 발목을 잡은 피 뭍은 손에 놀란 레인이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 쳤다. 곧 죽을 것 같은 남자의 팔을
 발로 차며 히스텔릭한 소리를 높였다.

 “아악!!”

 달빛이 다시 구름 뒤에서 나왔고, 그것에 비친 남자의 눈은 희게 뒤집혀 있었다. 그로테스크하게 꺾인 팔에 레인이
 구역질을 했다.

 “으...으흑...”

 시퍼렇게 언 레인의 얼굴에 흐르는 눈물은 얼굴에 튄 피와 섞여 붉게 되어 아래로 떨어졌다. 휘청거리며 문을 향해
 걷다, 발이 꼬여 넘어졌다. 바닥에 닿은 검은 머리카락이 땀과 피에 흥건히 젖어있다. 두꺼운 카펫도 다 흡수하지
 못한 피가 주르륵 흘러 레인의 발아래 고였다.
 고요한 가운데, 피가 떨어지는 끔찍한 소리만이 들려왔다. 넘어진 레인의 팔과 등에 소름이 돋았다. 공포와 추위,
 그리고 어둠 중에 어떤 것이 등을 떨리게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눈물은 쉴 새 없이 쏟아지고 손은 여전히 떨리지만 이를 악물었다. 이 방에 있는 누구도 자신을 해칠 수 없을 터였다.
 그래도 등 뒤가 서늘해 돌아보자 싸한 바람이 커튼을 스쳤다. 하늘거리는 커튼 사이로 어둠만이 가득했다. 한시간
 전까지만 해도 아름다운 별들이 가득한 하늘이었는데, 지금은 그저 을씨년스러웠다.
 수도꼭지를 열어 놓은 듯 후두둑 떨어지는 눈물은 입으로 흘러들고 턱을 지나 바닥으로 떨어지기도 했다. ‘망할
 연놈들’ 이라며 욕설을 내뱉으며 쓰라린 눈을 부릅뜨고 손톱에 힘을 줘서 일어나려는데, 덜컥 하는 소리와 함께 환한
 빛이 쏟아졌다.

 “어.. 어머나, 꺅!!”

 피를 본 여자의 날카로운 비명이 검은 공기를 순식간에 가르고 지나갔다. 어둠을 찢어발길 만큼 고의적이고 적의
 적이다. 콰당, 하고 여자가 뒷걸음질 치다 넘어지는 소리가 났다.
 비명의 주인공은 에이프런과 머리 수건을 한 궁중 하녀였다. 하녀가 지금 시간에 어째서 귀족이 있을 방의 문을
 열었을까? 아니, 그건 그렇게 주목할 일이 아니었다. 두 사람이 칼에 찔렸고, 레인이 손에 피를 묻힌 채 거기 서
 있다는 것이 더 중요했다.
 레인은 지금 이 일을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생각에 호박색 눈동자를 광기로 일그러뜨린 채 달려가
 시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금세 기다렸다는 듯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병사들이 나타나 레인을 끌어냈다.
 반쯤 기절한 시녀의 입가에 레인의 손에 묻었던 핏자국이 선명했다.



 * * *



 주변에서 와글와글 대는 소리와 함께 환한 빛무리가 눈을 파고들었다. 팔을 잡혀 거칠게 끌려가던 레인은 금방 정신을
 차렸다. 자유로운 한쪽 손으로 병사의 뺨을 호되게 내리치며 소리 지른 것은 그의 성격으론 당연한 일이었다.

 “더러운 손으로 감히 누굴 잡아? 내가 누군 줄 알고...!”

 레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사방의 병사가 달려와 레인의 팔을 제압했다. 강하게 붙잡힌 팔에 레인이 비명을
 질렀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이 벌레 같은 것들! 놓지 못해? 내게 이렇게 무례하고도 너희가 무사할 줄 알아?”

 새까만 머리카락이 땀에 흠뻑 젖도록 발버둥 치며 소리를 지르던 레인이 끌려간 곳은 감옥 앞에 넓은 홀이었다.
 지하로 내려가기 직전의 공간으로 벽의 윗부분에는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 돼 있었는데, 달빛이 그윽하게 스며들고
 있었다. 벽에 걸린 횃불이 바람도 없는데 흔들렸다.
 차가운 돌바닥에 내팽개쳐진 레인의 등을 병사들이 창으로 짓눌렀다. 레인이 으르렁거리며 몸을 비틀었다.

 “이 망할 것들! 내가 왜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해? 제국 황실이 이렇게 되먹지 못해서야!”
 “오, 이런.”

 얼굴이 뽀얗고 눈이 가는 남자가 빠르게 계단을 걸어 내려왔다. 그가 희극적으로 생긴 눈썹을 찌푸리며 병사들을 향해
 손사래를 쳤다.

 “어서 그 험악한 물건 치우게들. 레인경은 그런 것 없이도 얌전한 분이라네.”

 즉각 창이 치워졌다. 등을 짓누르던 창에서 해방된 레인은 도도하게 일어나 병사들을 쏘아보았다. 끓어오르는
 신경질을 참아내기 위해 숨을 몰아쉬고 돌가루와 피를 대충 털어내고 구겨진 옷깃을 바로잡았다.
 끌려오느라 떨어진 단추사이로 하얀 가슴이 설핏 비추었다.
 헝클어져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거만한 눈으로 주변을 훑어보는 레인을 보며 쭉 찢어진 눈을 가진 남자,
 마빈은 볼을 긁적였다. 흠뻑 젖은 얼굴과 상기된 두 볼, 오만하게 치켜뜬 눈이 말도 못하게 색기 넘쳤다. 온 몸에서
 진득한 색향이 흘러내리는 것이 태자가 정신 못 차릴 법 했다.

 “칼 마빈이오. 직함은 뭐-, 군 부단장 이오만은, 요즘은 애보기 바빠서.... 그만두고 아예 보모로 취직할까 하는
 중이라오.”

 마빈은 이것저것 해 달라 주문이 많은 태자를 애 취급 하곤 했다.

 “.....레인. 바네사 레인입니다. 이미 알고 계시는 것 같지만.”
 “아아. 가해자의 신원을 파악하는 일이야, 어려운 일도 아니지.”

 마빈이 호탕하게 웃으며 레인에게 의자를 권했다. 레인은 같이 웃으며 의자에 앉을 기분이 아니었다.

 “가해자라니, 전 피해잡니다.”
 “하하, 뻣뻣하게 굴지 않았으면 좋겠구려. 말했듯이 난 요즘 좀 바쁘다오. 질질 끌 시간이 없단 말이요. 두 사람이
 죽고 거기 경이 서 있었소. 경의 손에는 흉기로 사람을 찌르다가 생긴 상처가 있고, 팔 뻗는 거리에 있어야만 튈 수
 있는 양의 피가 경의 옷에 튀었다오. 바닥에 떨어진 칼은 바네사 가문의 문양이 나보란 듯이 새겨져 있고 경은
 목격자를 죽이려 했소. 이 정도면, ‘내가 범인이오.’ 라고 외치며 다닌거나 진배없잖소?”
 “그게 무슨...”

 준비 된 듯 쏟아져 나오는 마빈에 말에 레인은 현기증을 느꼈다. 아니었다. 다 틀렸다. 하지만 레인이 항변을
 쏟아내기도 전에 흰 천에 둘린 시체 두 구가 안으로 들어왔다. 마빈이 그 중 한 시체 위의 흰 천을 들어 올렸다.
 여자의 것으로 보이는 새하얀 다리가 드러났다. 허리까지 올린 하얀 천에 부끄러운 성지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방금
 정사를 치룬 듯 남자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있었다. 피도 정액도 아직 채 마르지 않았다.

 “알고 죽인 것인지 모르겠지만.”
 “잠깐, 뭔가 이상해! 나는...”

 이상했다. 일이 이상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분명히 아닌데, 정황은 레인을 살인자로 몰아가고 있었다. 마리아를 안지
 않았는데, 시체는 ‘섹스 했음.’ 을 주장하고 있었다.
 시신의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달려드는 레인을 병사들이 가로막았다. 마빈의 눈짓에 병사들이 레인을 결박했다. 줄에
 묶여 바닥에 꿇어앉혀지면서도 발버둥을 치던 레인은 뜻대로 되지 않자 마빈을 죽일 듯 노려보았다.
 아름다운 레인의 얼굴에 서슬 퍼런 살기가 서리자 지독히도 소름끼쳤다.

 “무슨 꿍꿍이야?! 난 아니라고 했잖아! 저것도 그 여자가 아니야!”
 “‘그 여자’가 누군지는 모르겠소만, 이 불쌍한 아가씨는 마리아 하인리히요. 곧 국모가 될 몸이었지. 성교한
 흔적이 있구료. 강간 했소? 대체 왜 죽였소?”

 말이 전혀 통하지 않았다. 아니라고 소리를 치던 레인은 마빈이 시체를 살펴보며 들은 척도 하지 않자, 심호흡을 하고
 이를 갈았다. 왜 갑자기 일이 이렇게 돌아가는지는 모르겠지만, 냉정하지 않으면 꼼짝없이 공작과 공녀를 강간,
 살해한 파렴치한이 될 판이었다. 아니, 파렴치한 정도는 아무래도 좋지만 상위 귀족 살해는 죄질이 상당히 무거웠다.

 “난, 죽인 적도, 마리아 하인리히와 섹스 한 적도 없어. 저 남자가 여자를 찌르고 자살한 거야. 알아들어?”
 “소설 쓰오? 그 말을 믿으라는 거요?”
 “아니면 내가 저 연놈을 죽어서 뭐해?”
 “그러게 말이오. 뭘 하려고 했소?”

 레인은 마빈의 가는 눈을 아주 찢어 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레인의 무례한 욕설과 반말에 눈도 깜짝 하지 않는 저
 삼십대 남자는 진실로 밉상이었다. 저 작자의 깐죽대는 말투에는 냉정을 찾는 것이 쉽지 않았다. 혈압이 올라서
 머리카락이 쭈뼛 설 정도였다.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가 반지하를 울렸다.

 “저. 전하.”

 마빈이 ‘뭐 하러 왔냐.’ 는 듯한 음성으로 맞이한 것은 태자였다.
 횃불에 음영이 드리워진 태자는 거만한 맹수 같았다. 지독하게 날이 선 수사자 같은 태자를 보자, 레인은 목이 콱
 막히는 것을 느꼈다. 싸늘하게 내려 보는 회색의 눈은 ‘내 약혼녀를 네가 죽였지?’ 하고 말하는 것 같아 오금이
 저렸다. 침을 꿀꺽 삼키자 태자가 시체를 힐끔 보며 말했다.

 “내 눈을 믿을 수가 없군.”

 태자의 담담한 어조에 레인이 숨을 죽였다. 자신이야 말로 ‘이게 현실인가’ 싶은 상황에 처해있었다. 죄를 뒤집어
 씌워 본 경험은 있어도 써본 경험은 없는지라 심장이 불안함에 미칠 듯이 뛰었다. 그러다 보니 태자가 구명줄인지,
 상황을 악화시킬 폭탄인지 선뜻 구분이 가지 않았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기 때문인지, 착각이겠지만 태자의 회색 눈이 웃고 있는 것 같아 레인은 비굴하게
 매달렸다.

 “전하. 억울해요. 억울합니다!”
 “흠.”

 두 무릎으로 기어 태자 발아래 가 눈물이 그렁한 눈으로 결백을 주장했다. 마빈이 뒤에서 ‘하’ 하고 기가 차다는
 듯한 신음을 뱉었지만 레인은 아이처럼 엉엉 울며 바네사 가문에서도 사람을 보내 이 사건에 대해 좀 더 조사하게 해
 줄 것을 요구했다.
 방금 전까지 마빈과 병사들에게 욕을 퍼부으며 발광을 하던 모습은 완전히 사라지고 날개 뜯긴 가련한 천사만이
 자리에 남았다. 커다랗고 맑은 눈에 가득 고여 흐르는 눈물은 애달았다.

 “제가, 제가 어떻게 전하의 약혼녀를 죽일 수 있겠어요? 전하, 저는 정말..”
 “레인.”

 머리 위에서 들리는 부드러운 어조에 레인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눈물에 젖은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들자
 주변이 모두 침묵했다. 고개 들어 바라본 태자는 악당처럼 비열하게 웃고 있었다.

 “그대에게 선택권을 주지. 제국 법에 대해선 좀 아나?”

 레인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법에 대한 것은 눈곱만큼도 알지 못했다.

 “이런 경우 제국 법은, 가해자에 대한 처분을 여자의 약혼자에게 위임하지. 무슨 말인지 알겠어? 내가 그대의 운명을
 쥐고 있다는 말이야. 네 앙큼한 물건을 자르든, 독사 같은 혓바닥을 자르든. 설령 네 아름다운 눈을 뽑아 돼지 오물
 속에 버려도 누구도 이의를 제기 할 수 없어.”

 레인은 그제야 태자가 구명줄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태자의 크고 거친 손이 눈 위를 쓸어내리자 심장이 미칠
 듯이 뛰었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주먹을 꽉 쥐었다. 찢어진 손바닥에서 나온 붉은 피가 바닥에 떨어졌다.

 “하지만 레인. 난 그렇게 할 생각은 없어. 나는 네 눈을 몹시 좋아하거든. 눈물에 젖으니 더 예쁘군. 그럴 거라
 예상했어. 이렇게 아름다운 눈을 돼지 오물 속에 버릴 수는 없지. 그러니까 그대가 내가 원하는 대로 순순히
 ‘그러마’ 해주길 바래. 어떡할래, 레인?”

 태자가 분노로 바르르 떨고 있는 레인의 귓가에 입을 맞추었다.

 “착하게 내 노예가 되어볼래?”

 따뜻한 입김에 레인이 끔찍해하며 바르르 떨었다. 태자의 뺨을 당장 후려갈길 수만 있다면 마귀에게 영혼을 팔아도
 밑지는 장사는 아니겠다 싶었다.

 “.......싫다면 내가 무엇을 선택할 수 있지?”

 눈앞에 장난스럽게 웃고 있는 태자를 씹어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레인의 오만방자한 말투와 표정에 태자가 큰 소리로
 웃었다. 진심으로 즐겁다는 듯이 웃어서 레인은 얼굴을 찡그렸다. 제 정신이 아니구나. 역시 진지하게 생각했다.

 “순순히 그렇게 되거나 차라리 죽이라고 날 뛸 수도 있겠지.”
 “그거 좋군.”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단호하게 생각했다. 귀족으로 태어나고 자라 선민의식으로 똘똘 뭉친 레인의 교만한 머리는
 평민도 견딜 수 없었다. 하물며 노예라니. 노예제도가 비활성화 된 제국에서는 속국의 최하급만이 그런 대접을 받았다.
 노예는 사람이 아닌, 가축의 한 종류다.
 레인은 시중드는 하인이 없으면 3일도 안되어 굶어 죽을 타입이었다. 그 흔한 손톱소제 한 번도 제 손으로 해 본 적
 없는 천상귀족이 바로 그였다. 노예가 되라니. 자존심에 상처받은 레인은 더 오만하게 고개를 쳐들었다.

 “오명을 뒤집어쓰고 노예로 살 바에는, 죽는 게 나아. 난 결백해.”
 “안타까운 선택을 하는군. 뭐, 그 쪽이 좋다면야.”

 태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빳빳이 들었던 레인이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정말 죽일 셈인가? 순순히 ‘그러렴.’ 하는 태자의
 모습을 눈앞에서 보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자신의 삶이 이렇게 어이없게 끝나다니.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 것인지 채
 파악도 하기 전에.... 이 모든 것이 하나의 장난인양 현실감이 없었다. 자신을 싫어하는 누군가가 꾸민 음모 같기도
 했다. 여자가 그를 유혹하고 채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사형이 선고된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태자가 멀뚱히 서 있는 마빈을 불러 눈짓 했다.
 궁시렁 거리던 마빈이 자신에게로 걸어오는 것을 보며 레인은 ‘정당한 재판 한번 치루지 않았는데, 정말 죽는건가?
 정말? 정말 내가 죽어?’ 하고 묻고 싶었다.
 마빈이 공황 상태에 빠진 레인에게 다가와 힘내라는 듯 등을 탁탁 치고 일으켜 세웠다. 저항 없이 일어난 레인이
 멍하게 태자를 바라봤다. 그의 회색 눈동자는 기이한 열망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장난감을 손에
 넣은 아이처럼 순수한 광기가 얼룩처럼 묻어있다.

 “나, 죽는 거야? 지금 죽으러 가는 거야?”

 마빈을 향해 물었는데 태자가 대답했다.

 “아니. 좀 더 어렵게 내 노예가 되는 거야. 반항 할 수 있을 때까지 반항해 봐. 그대의 근성을 높이 사주지.”

 팔뚝에 돋아난 소름을 느낀 레인이 눈앞에 계단을 바라봤다. 작은 횃불이 정신없이 흔들려 이리저리 그림자가 지는
 지하 계단은 심연 같았다. 공기 없는 깊은 바다 속을 걸어가자고 하는 듯 해 눈앞이 아득해졌다.
 결국 스트레스가 극한까지 차오른 레인이 몸부림쳐 마빈의 손을 뿌리쳤다. 그리곤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욕과 함께
 소리 질렀다.
 일그러진 눈과 얼굴은 아름다움과 대조되 더 끔찍하고 소름끼쳤다.

 “아버지를 불러, 이 마귀야! 좀 더 조사해 보란 말이야! 멍청이! 쪼다 같으니라고! 어딜 봐서 내가 범인이라는 거야?
 다 죽어버려, 죽일 거야! 죽여 버릴 거라고! 너희가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아? 더러운 쥐새끼!”

 놀라 작은 눈을 크게 뜬 마빈을 발로 차 계단 아래로 구르게 만들었다. 마빈이 세 계단을 구르며 켁, 하고 주책맞은
 비명을 질렀다.
 미친 사람은 보통 사람보다 힘이 세다더니 딱 그 짝이었다. 세 명의 병사가 레인에게 달려들어 얻어맞으며 제압했고,
 제압당한 뒤에도 악귀 같이 눈을 뒤집고 몸을 비틀었다.
 레인에게 밀려 바닥에 나동그라진 마빈은 발악하는 그와, 좋다고 킬킬대며 경박하게 웃는 태자를 얼빠진 얼굴로
 번갈아 바라보았다.
 천생연분이구나. 좋겠다. 잘 어울려서.
 괜히 신경질이 난 마빈이 머뭇거리는 병사들을 향해 소리 질렀다.

 “뭐해? 빨리 안 끌고 가고?”

 병사들이 울상을 지으며 레인을 끌고 지하로 내려갔다. 레인이 사라진 어두운 지하로 비명과 절규, 욕설과 저주가
 아득히 들려왔다.
 예쁘장한 게 성격과 입은 왜 저렇게 더러운지 모르겠다. 옷에 묻은 먼지와 돌가루를 털어내며 일어난 마빈이 차마 못
 들어줄 욕설에 귀를 후볐다.

 “......저런 게 정말 좋으십니까?”
 “응. 솔직하고 꾸밈없는 모습이 인상적이군. 좀 무례하긴 하지만.”

 마빈이 ‘어이구, 저 진상-.’ 하고 낮게 투덜댔다.
 좀 무례한 것이 저 정도면, 그냥 무례한 것은 대체 뭐란 말인가.

 “적당히 타일러서 내려 보내면 편할 것을 왜 오셔서 이 난리를 피웁니까?”
 “음, 저 모습이 보고 싶어서.”

 소인배처럼 음침하게 웃는 태자의 모습에 또다시 위가 쿡쿡 쑤셔오는 것을 느낀 마빈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제국의 미래가 몹시 어두울 것이라는 데에 한 달 월급을 다 걸어도 좋았다. 자신과 같은 생각인지, 침통한 표정을
 하는 시종들을 다독여 태자와 함께 파티장으로 돌려보낸 마빈이 넘어져 아픈 엉덩이와 다리를 절뚝거리며 레인이
 사라진 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6.


 다음날 아침. 레인이 노예가 되기로 했다는 보고를 들은 마빈은 태자를 데리고 지하 고문실로 내려갔다.
 고문실에 다른 죄수에 비해, 레인은 말끔한 편이었다. 양 손 각각 세 손가락 손톱의 반쪽이 잘려나가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제국의 고문실에 들어온 역대 죄수 중에 가장 얌전한 대접을 받은 것이었다.
 물론 그건 제국의 고문실 입장이었고, 고통이라는 감정에 익숙하지 않은 레인으로서는 그나마도 많이 버텼다.

 “저게 뭐야? 왜 저래놨어?”

 지하로 내려와 퀴퀴한 냄새를 킁킁대며 ‘고문실치곤 너무 밝지 않나.’ 고 빈정대던 태자는 레인을 보자마자 냉큼
 짜증을 버럭 냈다.

 “뭐가 말입니까?”

 태자가 심상치 않아보이자 화들짝 놀란 마빈도 레인을 살폈다. 의자에 묶인 채 재갈을 물고 곤히 자고 있는 모습은
 아무리 살펴봐도 이상 할 것이 없었다. 마빈은 태자가 시킨 데로, ‘노예가 될게.’ 하고 말할 때까지 ‘적당히’
 레인을 어루만져 줬을 뿐이었다. 적당히 만져줬다고 하기에는 너무 얌전했나? 마빈이 우물쭈물 하는 사이 태자가 벌컥
 화를 내며 옆 탁자를 내리쳤다.
 아니, 이 양반이 대체 왜 이래? 마빈이 눈을 동그랗게 떴고 그 소리에 놀란 레인도 눈을 떴다.

 “혀를 깨물었나?”
 “예. 여섯 번째 손톱을 자를 때.”

 냉큼 대답하는 고문관의 모습에 마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입가에 벌건 것이 피였구나. 그러고 보니 입을
 다물지 못해 흘린 침으로 턱 주변이 축축해 보였다. 자는데도 재갈을 풀어주지 않은 것은 또 혀를 깨물까봐 해 놓은
 방비였으리라. 사람이라는 게 원래 생소한 고통을 겪다보면 비명을 지르다 혀도 깨물고 그러는 거지.- 하고 평범한
 생각을 하던 마빈은 레인과 태자가 으르렁 거리고 있는 것을 미처 몰랐다.
 고문관이 일곱 번째 손톱에 칼을 댔을 때 ‘노옌지 발걸렌지 하면 될 거 아냐!’ 하고 소리를 버럭 내지르다 실수로
 혀를 깨물었던 레인은 불편한 잠자리와 무뢰한의 책상 치는 소리에 난생 처음 억지로 잠에서 깨어났다. 잔뜩 부은
 핏발 선 눈을 떴을 때 보인 현실은 몹시 엿 같았다. 안 그래도 꼴 뵈기 싫은 태자가 매섭게 찢어진 눈으로 으르렁대고
 있던 것이다. 입에 재갈이 물려 욕은 할 수 없고 같이 짐승마냥 으르렁 대자, 태자가 예의 그 어슬렁거리는 걸음으로
 다가와 재갈을 풀러줬다. 주륵. 말간 침과 피가 재갈로 딸려 나왔다. 수치스러운 기분에 오만한 시선을 피했지만 곧
 태자에게 턱을 잡혀 그를 바라봐야 했다.

 “뭐야? 이거 놓지 못해?”
 “혀를 깨물었어? 죽으려고 했단 말야?”

 턱을 잡는 힘이 점점 우악스러워져갔다. 나르시즘이 심각한 수준이라 얼굴 상처에 민감한 레인은 멍이 들까 싶어 턱을
 흔들지도 못하고 바르르 떨었다. 이 미친 자식이, 정말.
 퉷. 딱 죽여 버렸으면 좋겠다는 심정으로 태자에게 침을 뱉었다.
 마빈이 뒤에서 헉 하는 신음을 뱉었다. 태자의 매끈한 턱으로 레인의 침이 흘러내렸다.

 “죽긴 누가 죽어? 널 갈아 마시기 전엔 죽여도 안 죽을 거야. 내가 죽을 것 같아?”

 태자가 턱을 잡고 있던 손을 놓고 얼굴에 묻은 침을 닦았다. 마빈이 재빨리 달려와 손수건을 내밀었지만 태자는 본
 척도 하지 않고 레인을 보며 교활하게 눈을 휘며 웃었다. 사나운 회색 눈은 금방이라도 폭발 할 것처럼 아슬아슬 했다.

 “줄을 풀어.”

 태자가 명령하자 고문관이 재빨리 결박을 풀었다. 줄이 풀리자마자 태자가 투박한 손으로 레인의 탐스러운 머리카락을
 잡아 끌어냈다.

 “악! 무슨 짓이야, 개자식아!”

 하하하, 호탕하게 웃은 태자가 비명을 지르는 레인의 머리를 바닥에 찍어 눌렀다. 차가운 돌바닥에 무릎을 찧으며
 엎드리게 된 레인이 이를 악물고 태자를 노려봤다. 태자가 레인의 허리부분의 하얀 셔츠를 들어 올리자, 마빈도
 비명을 질렀다.

 “전하! 여기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태자가 미쳤다는 소문이 파다하더라도, 지하 감옥에서, 그것도 고문관들이 보는 앞에서 강간 하는 것은 안 될
 일이었다. 마빈이 그를 말리려 달려가자 태자가 레인의 바둥거리는 두 팔을 한손에 움켜쥐고 말했다.

 “인두 가져와. 지금 찍겠다.”
 “아! 아, 이런. 직접 찍으시게요?”
 “그래.”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더니...... 안도의 한숨을 내쉰 마빈이 고개를 살래살래 젓고 부하들에게
 눈짓했다. 소독을 하기 위해 다가가자 태자가 약병을 빼앗아 레인의 허리위에 흠뻑 부어버렸다. 마빈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러났고 곧 붉게 달구어진 인두가 대령되었다.

 “하, 하지 마.”

 엄청난 힘으로 짓눌려져 꼼짝도 할 수 없는 레인이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인두를 담은 화로에 열기가 두 볼을
 화끈거리게 했다. 독한 소독약 냄새에 등 뒤로 꺾인 두 팔에는 작은 소름이 돋았다. 흠뻑 젖은 허리는 긴장으로
 고통스러우리만큼 경직되어 있었다.

 “움직이지 마. 움직이면 다칠 거야.”

 몸부림치려던 레인은 그 말에 숨을 죽이며 달달 떨었다. 태자가 레인의 왼쪽 등허리 아래쪽에 입을 맞추었다. 따뜻한
 느낌에 부르르 떨며 식은땀을 쏟았다.
 곧 인두가 닿았다.
 레인은 처음에는 차갑다고 느꼈다가 곧 밀려오는 구역질나는 고통에 온 몸으로 경련했다. 혀를 깨물지 못하도록
 태자가 그의 입에 손을 물렸지만 그것조차 몰랐다. 하얀 김이 치지직 소리를 내며 위로 올라왔다. 고기타는 냄새가
 고문실 안에 진동했다. 인두를 떼어내자 회색으로 익은 자국에서 연기가 뭉게뭉게 솟아올랐다.

 “아아악!”

 그제야 레인의 목구멍에 걸려있던 비명이 쏟아져 나왔다. 허리에 새겨진 반쪽 태극 안에 섬세한 문양이 아프게 레인을
 찌르고 있었다. 꺽꺽대는 레인의 머리카락을 움켜잡은 태자가 그의 귀에 속삭였다.

 “그대가 얌전히 있은 까닭에 아주 예쁘게 나왔어. 볼래?”

 변태처럼, 고통에 질려 벌벌 떨고 있는 레인에게 말을 걸며 웃는 태자의 작태는 상당히 볼만했다. 고기 냄새가 나지
 않는 자리에서 한참을 구경하던 마빈이 식은땀을 줄줄 흘리는 레인의 코앞에 마약성분이 다량 함유된 진통제 가루를
 가져다 댔다. 허리와 손톱에도 진통제를 뿌렸다.
 효과가 있는지 고통과 감각이 점점 줄었다. 마약성분이 온 몸에 퍼져 몽롱한 기분이 된 레인온 몸을 축 늘어뜨리고
 숨을 몰아쉬었다. 온 몸이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태자가 자상하게 이마에 땀을 닦아주었다.

 “....병 주고 약 주는군. 네 놈들이 너무 싫어서 미쳐 버릴 것 같아.”

 마빈은 어깨를 으쓱하며 일어났고, 태자는 아이처럼 미간을 찌푸렸다. 잠들려는 레인을 향해 도전적인 어조로 물었다.

 “누가 더 싫지?”

 아이고, 두야. 마빈은 자신이 다 쪽팔리는 것을 느꼈다. 저 덩치에 저런 순박한 질문이 가당키나 한가. ‘월급 많이
 주는 직장’이 최고의 직장, 이라는 평소의 신념이 날이 갈수록 위태로워지고 있었다. 더 이상 자리에 있을 수 없어진
 마빈이 밀린 업무를 보러 고문실을 나섰다.
 평소라면 ‘젖먹이도 네 앞에선 울고 가겠구나. 대체 몇 살이냐?’ 며 빈정대 마빈의 속을 시원하게 해 줬을 레인은
 약에 취해 제 정신이 아닌 고로 태자의 품속에서 눈을 사르르 감으면서 마른 입술을 핥았다.

 “둘 다 싫어. 아주 아주 재수 없어.”
 “누가 더 싫으냐고 물었어. 하나만 선택해.”

 태자는 몹시 진지한 얼굴이었다. 나쁜 짓을 잔뜩 하긴 했지만 자신이 더 싫다고 하면 왠지 조금 쓸쓸 할 것 같았다.
 아주 유아적이고 이기적인 생각이지만 원래 그는 유치하고 저만 아는 놈이었다.
 한참을 고민하는 것 같던 레인이 입술을 바르르 떨었다. 태자가 두근대 하며 바라봤지만 열린 입술에선 좀처럼 판결을
 내려주지 않았다.

 “어서 말해.”

 태자가 레인의 어깨를 흔들며 재촉하자 이윽고 그의 입에서 소리가 새어나왔다.

 “......흔들지 마. 멍청아.”

 철썩!
 휘청거리며 허공을 가로지른 레인의 손이 태자의 뺨을 내리쳤다. 얼마나 옴팡지게 쳤는지 뺨에 손바닥 자국이 그대로
 남았다.
 태자가 떨떠름하게 레인을 바라봤고, 레인은 어느새 쌕쌕 숨소리를 내며 완전히 잠들었다.



 * * *



 한편, 바네사 성에서는 레인의 소식이 전해졌다.

 “오, 신이시여! 이 무슨 끔찍한 음해란 말인가!”

 백작이 침통한 얼굴로 양피지를 구겼다. 믿을 수 없는 말들이 긴 양피지 한 가득 쓰여 있었다. 세상에 둘도 없는 착한
 우리 아들이 어쩌고저쩌고. 대답 없는 하늘에 외치고 있는 사이, 그의 애첩 샬롯은 구겨진 양피지를 들고 글을 읽어
 내려갔다.
 강간, 살해.... 끔찍한 죄목을 읽어 내려가며 샬롯도 믿을 수 없다는 기분이 되었다. 물론 비록, 백작의 레인에 대한
 찬사에는 손톱만큼도 동의 할 수 없었지만, 그는 분명 강간을 하거나 누군가를 죽일 사람은 아니었다. 레인은 여성을
 설득해 잠자리를 해치우는 데에 엄청난 승부욕과 프라이드가 있었다. 작업 거는 것을 삶의 전부로 생각하고 즐겨하는
 그가 처음 만난 여성을 강간하다니, 그럴 리 없었다. 그에게 강간이라는 말은, ‘금욕’ 이라는 단어만큼이나 안
 어울렸다. 게다가 살인이라니. 이것은 더욱 그랬다. 그렇게 무모한 사람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문란하고 변태적인
 성행위를 좋아하긴 하지만, 상처를 입히는 타입은 아니었다. 피를 싫어해서, 아무리 공들여 꼬신 여자라도
 생리중이라고 하면, 가슴도 더듬지 않았다.

 “내 이래서 레인을 수도에 보내기가 싫었어! 오, 이를 어쩌면 좋단 말인가...”
 “저도 믿어지지 않는군요. 하지만, 증거가 이렇게 뚜렷해서야....”

 샬롯이 혀로 입술을 축였다. 양피지에 적힌 사건의 정황은, 탄원 할 생각은 하지도 말라는 듯 위압적인 어조로 레인의
 강간 살해를 주장했다. 조목조목 적힌 증거와 증인은, 과하다 싶을 정도였다.
 증거 부분을 다 읽은 샬롯이 침을 삼킨 것은, 레인의 형벌에 관한 부분에 눈이 머물렀을 때였다.

 “.......맙소사.”
 “크음....”

 백작이 침음을 삼켰다. 자신도 읽고 걸려 하던 부분을 샬롯이 읽은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죽는 게 낫겠군요.”
 “태자 전하가 우리 가문에 악감정이 있지 않고서야, 이럴 수는 없는 게다.”
 “모욕적인 일입니다.”

 귀족 자제가 노예가 된다. 이것은 쉽게 말 할 일이 아니었다. 아무리 백작의 지위가 공고 하더라도 혈육에 노예가
 있다면, 가문이 격하 될 위험이 있었다. 아들은 노옌데, 아버지가 백작? -레인이 노예치곤 고상한 생활을 할 수도
 있겠지만, 백작 또한 합당한 대접을 받지 못할 터였다. 하는 일 없는 바네사 식구들을 영지민들이 떠받들고 있는
 이유는 그들이 귀족이기 때문이지 존경하고 마음 깊이 섬기기 때문은 아니었다. 노예를 섬기라고 한다는 것은,
 신분질서에 큰 혼란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아무리 상황이 나쁘다고 해도 그에게 정말 마구간을 돌보게 할 수는 없었다. 백작은 그 큰 얼굴 가득히
 수심을 띄었다.
 태자의 노예라 바네사 영지로 돌아오지 못한다는 것을 다행이라고 여겨야 할까? 아들이 객지에서 그런 대접 받는 것은
 괴로운 일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돌아온다고 해도 처치곤란인지라 이래저래 안심이 되기도 했다.
 사실 지금 당장은 레인의 안위가 걱정되기도 하지만, 그보다 가문의 위기가 더 문제였다. 레인이 죽인 것이 공작이고
 그녀의 딸이라면, 식솔 전체가 노예가 된다고 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레인 하나로
 끝내주는 것을 고맙게 여겨야 할지도 몰랐다.
 레인의 결백을 주장하여 태자에게 맞서야 할 것인가, 아니면 이대로 물러나 이 사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전자는 레인이 범인이 아닌 것을 밝혀낸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그렇지 못한다면 딴지를 걸었다는 점에서 옴팡 뒤집어
 쓸 위험이 있었다. 후자는.........
 백작은 고통스러운 선택의 기로에서 고민하는 척을 했다.
 샬롯이 한숨을 내쉬며 그의 입에 양고기를 볶아 만든 별미를 한 주걱 퍼 넣었다. 한때는 몸을 섞었던 자라 동정심이
 일기는 하지만, 레인이 없는 것이 하인들을 다스리기에는 더 좋다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었다. 비실비실하던
 백작부인이 요즘은 아예 거동을 못하는데 레인까지 사라지면, 성을 치마폭에 넣고 흔드는 것이 좀 더 쉬울 법 했다.
 샬롯이 넣어주는 음식을 씹으며 한참을 괴롭게 고민하는 척을 하던 백작은 침통하게 입을 열었다.

 “가문을 위한 선택이지만 아버지로서 나는 너무도 괴롭구나. 우리 불쌍한 레인. 이 못나고 무력한 애비를
 용서해다오..”

 항의는 하지 않겠다는 말이다. 비굴한 근성을 가진 백작은 하늘에 대고 절절한 원망을 하면서도 일어나 주먹한번 쥐지
 않았다.

 “레인님은 백작님의 이런 마음, 모두 다 헤아리고 있을 겁니다.”

 샬롯도 함께 마음에 없는 소리를 지껄였다.

 “차라리 날 용서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너무 착한 아이라 원망도 못 할까 싶어.”

 절대로 그럴 리 없으니 걱정 말라는 말을 삼키며 백작이 시키는 대로 레인의 파문(破門) 공지를 쓰고 식사를 끝낸
 백작의 더러운 주변을 깨끗이 정리했다.
 하인들을 시켜 식탁을 물린 후, 샬롯은 그의 물렁한 배와 성기 위에 주저앉았다. 음식냄새 가득한 입에 키스하고
 커다란 손을 들어올려 직접 가슴위에 올려놓고 느끼는 척 신음을 뱉었다.
 사실 레인은 백작과 많은 부분이 닮아있었다. 식욕 대신 성욕이 발달했을 뿐, 저렇게 비겁한 성미나, 저밖에 모르는
 이기심은 ‘역시 부자지간이구나!’ 싶을 만치 똑같다.
 그래도 외모가 출중하니 다 감수 할 수 있었는데.... 이제 레인은 없을테니, 귀찮겠지만 착하고 똑똑하고, 그리고
 야망 없는 놈으로 정부를 하나 거느려야 했다. 백작의 물렁한 살덩이와 완전히 반대되는 탄탄한 근육을 가진 놈.
 레인을 특별히 좋아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테크닉과 외모만은 잊지 못할 성 싶었다.
 샬롯의 봉사를 받으며, 백작은 탁자위에 놓인 파문 문서를 아쉽게 바라봤다. 다른 놈들이라면 두말도 안 했을 텐데,
 왜 하필 자신이 예뻐하는 레인에게 이런 일이 생긴 건지 싶다. 죽었다는 것이 같은 백작정도만 되었어도 수작 좀
 부려봤을 텐데. 태자가 뒤에 서 있는 것도 문제였다. 아무리 예뻐해도, 모든 것을 포기할 도박을 하기에는 백작은
 너무 물렁한 사람이었다.
 포기해야 할 모든 것 중에 ‘호화로운 식생활’이 포함 되어 있다는 점은 특히 그를 비겁한 사람으로 만드는
 스트라이크 존이었다.
 샬롯이 그의 위에 앉은 지 몇 분 지나지 않아 백작이 짐승의 신음을 뱉었다. 샬롯도 절정에 다다른 척 하며 교성을
 높였고, 둘은 서로를 안으며 레인에 대한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7.


 죽은 듯이 잠들었던 레인은 아픈 머리에 신음하며 잠에서 깨어났다. 숙취가 싫어 술도 잘 마시지 않는 레인에게는
 굉장히 곤욕스러운 일이었다. 레인이 자는 것을 감시라도 한 듯 잠에서 깨나자마자 시종이 들어와 침대 앞에 무릎
 꿇고 영양주스를 건넸다.
 맹한 정신으로 주스를 마시며 레인은 잠시, 평소와 다름없는 아침 풍경에, 어제의 일이 모두 꿈인가 했다. 곧 붕대로
 감긴 손가락과 허리에 느껴지는 통증에 현실임을 깨달았지만 여기저기가 아프고 결린다는 것 외에는 바뀐 것 없는
 환경에 안심했다. 오후에는 마사지와 안마를 받아야지. 스트레스로 굳은 어깨와 허리근육이 못마땅했다.
 물을 묻힌 부드러운 수건으로 얼굴과 목을 닦아주는 시종의 손길을 익숙하게 받으며 붕대에 감긴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그냥 손톱 자르기 전에 ‘그러마’ 할 것을. 화가 나 답지 않게 군것에 대해 반성했다.

 “태자 전하께서 찾으십니다. 레인님께서 깨어나시는 것이 늦어, 전하께서 많이 진노하셨습니다. 서두르십시오.”
 “뭐라구?”

 레인이 시종을 째려봤다. 궁중 시종들은 이렇게 다 무례한가. 태자가 찾는 건 찾는 것이고, 감히 자신에게 명령조로
 요구하는 것은 이야기가 달랐다. 침대 맡에 놓여있던 물그릇을 획 밀어 끼얹고 깜짝 놀라는 시종을 발로 찼다. 쨍,
 물그릇이 깨지는 소리에 시종들이 우르르 들어와 바닥을 정리했다. 그들을 노려보며 레인은 침대에 다시 누웠다.
 태자가 찾는다, 라. -도톰한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손톱도 뽑히고, 나름대로 갈 데까지 간 이상 굽실대는 것도
 성격에 안 맞았다.
 생각을 정리한 레인이 문 앞에 서 있는, 시녀장으로 보이는 나이 지긋한 여자를 나른하게 불렀다.

 “이봐. 거기.”
 “예.”

 공손하게 허리를 굽히는 여자의 모습에 흡족하게 웃었다.

 “내가 손과 허리가 아파서 못 움직이겠네. 보고 싶은 사람이 직접 와 줬으면 쓰겠다고 전하께 좀 전해주시겠나?”

 여자는 두 말도 않고 고개를 숙이며 사라졌다. 레인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머물렀다. 노예의 낙인이 찍히긴
 했지만,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은 건 아니다. 소식이 바네사 성에 도착하면, 자신을 구하러 아버지가 올 터였다. 큰
 힘은 발휘 하지 못해도, 재수사 정도는 요구 해 주겠지. -하고 레인은 안일한 생각을 했다. 그는 자신의 풀네임에서
 ‘바네사’가 떨어져 나간 것을 아직 모르고 있었다.
 별로 변한 것도 없는 것 같은 나른한 아침에 창밖에서 지저귀는 새소리를 듣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
 귓가로 웃음이 섞인 듯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만 일어나.”
 “악!!”

 설풋 들었던 잠에서 화들짝 놀라 깼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태자가 레인이 채 눈을 다 뜨기도 전에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침대 위에서 끌어내렸던 것이다.

 “악! 미. 미쳤어?”
 “하하. 천만에.”

 욕설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더 강하게 잡아당기는 태자의 손에 막 잠에서 깨어 정신이 없는 레인은 비명을 높였다.
 팔을 허리춤까지 내려 걷는 그 때문에 바닥에 기다시피 하며 질질 끌려갔다. 머리카락이 뽑혀 나갈까봐, 그의 손을
 강하게 떼어내지도 못하고 다만 할퀴고 꼬집으며 붉은 카펫 위를 구르고 기었다. 손가락에 매어진 붕대에서 피가
 흘러나와 머리카락과 바닥 위로 떨어졌다. 땅을 짚은 곳마다 선명한 손자국이 남아 시녀들을 슬프게 했다.

 “놔! 제발 놓으라구!”

 머리카락이 한 움큼 뽑혔는지 두피가 얼얼했다. 얌전히 따라가겠으니 제발 놓으라고 말해도 들은 척도 않던 태자가
 멈춘 곳은 금장식이 된 커다란 문 앞에서였다.
 바닥만 보고 끌려오던 레인은 바닥 카펫의 색이 군청으로 바뀐 것을 깨닫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곤 침을 삼켰다.
 심하게 넓은 그 곳이 어떤 곳인지 레인은 너무나도 잘 알았다. 커다란 룸 안에 가구는 자색 루비가 박힌 침대 단 하나
 뿐이었다. 레인도 성에 이런 방을 가지고 있었다.
 넓은 방에, 그만큼이나 넓은 침대. 그의 것보다 스케일은 컸지만 용도는 비슷해 보였다.
 레인이 주춤, 뒤로 물러섰지만 곧 태자가 거칠게 그를 방 안으로 던졌다. 쿵, 하고 바닥에 처박히자 갈비뼈가
 부딪혔는지 한동안 숨이 턱 막혀왔다.
 정신이 헤롱거리는 사이에 곧 강한 힘에 침대 위로 던져졌고 쿠션 좋은 매트는 레인을 한번 튕기고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잠시 푹신한 매트위에 엎드려 씩씩거리며 숨을 고른 레인은 머리맡에 쿠션을 태자에게 집어 던졌다.

 “이게 무슨 짓이야?”
 “노예 주제에 너무 건방져. 그대는 좀 더 공손 할 필요가 있어.”

 사실이었다. 노예가 아니라 원래대로 백작의 아들이었더라도 레인의 행동들은 몹시 무례했다. 레인 자신도 그것을
 깨닫고는 백작 아들보다, 노예가 더 좋은 것 아닌가 생각했다. 가증 떠는 것이 싫었던 적은 한 번도 없지만, 태자를
 향해 아랫것들 대하듯이 마음대로 욕하고 소리 지르고 할 수 있다는건 꽤나 매력적인 일임이 분명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무례하다고 죽이진 않을 것 같고....
 레인에게 건방지다고 말한 것 치고는 빙글빙글 웃고 있던 태자가 레인이 던졌던 쿠션을 침대 위에 놓았다.
 그제야 태자의 얼굴을 제대로 본 레인은 하, 하고 높은 웃음을 뱉었다. 누군가에게 맞았는지 그 잘생긴 얼굴에 붉은
 손자국이 고대로 나 있었다.

 “내가 건방진 것이라면, 당신의 얼굴에 손바닥 자국을 낸 요망한 계집은 어떻게 됐지? 사형이라도 당했나?”
 “노예가 되어 내 앞에 있지. 별로 요망하진 않아.”

 낄낄대고 웃다가 힉, 하고 숨을 들이켰다.

 “난 그런 적 없어.”
 “눈 돌리지 마. 난 어제의 일로 그대에게 화가 많이 나 있어.”

 아름다운 미간에 주름이 접혔다. 무슨 말만 하면 다 자신의 탓을 하니, 레인으로서는 짜증이 날만도 했다.

 “공녀와 공작도 내가 죽였고, 태자의 얼굴 상처도 내가 낸 것이다. - 이 말이야? 하, 좋아. 다음엔 뭘 뒤집어씌울
 작정이지?”

 빙그레 웃은 태자가 셔츠 단추를 푸르며 레인에게 다가갔다. 커다란 그림자가 위압적으로 다가와 주춤하며 뒤로
 물러나려는 레인의 턱을 잡고 입술을 내리 눌렀다. 세상에 태어나 단 한 번도 키스를 거부한 적이 없었던 레인은
 무방비하게 벌린 입술로 태자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곧 후회했다. 숨 쉴 틈 없이 몰아치며 입속을 헤집는 단단한 혀는
 마치 정복자처럼 입안을 훑었다. 마치 제 집인 양 거들먹거리며 혀를 뽑아낼 듯 엉켜오는 숨에 레인이 참지 못하고
 그를 밀어냈다.

 “읏...!”

 주르륵, 얽혀있던 혀가 빠져나가며 입안을 맴돌던 타액이 입가로 흘렀다. 순순히 물러선 태자의 입술 주변도
 번들거렸다.

 “좀 더 하고 싶어.”

 레인이 참지 못하고 손을 들어 올렸고, 태자가 가볍게 그 팔을 제압했다. 잡히지 않은 손을 들어 올리자 그것마저
 잡혔다. 양 팔이 잡히자 온 몸을 부르르 떨며 발로 태자의 가슴을 걷어찼다.

 “큭!”

 태자는 야무지게 힘껏 걷어 찬 발에 얻어맞으면서도 레인의 양 팔을 놓지 않았고, 눈 깜짝 할 사이에 레인은 태자의
 위에 올라앉게 되었다.
 태자가 레인을 올려보며 씨익 웃고 그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며 상체를 일으켰다. 다시 키스하려는 태자에게 레인이
 노란 눈을 부릅떴다. 머리카락이 잡아당겨져서 낑낑거리면서도 턱을 잔뜩 들어 올리며 건방지게 말했다.

 “하지 마. 그런 바보 같은 테크닉으로 감히 누구 입에 혀를 들이미는 거야?”

 레인이 화가 난 것은 태자가 무례하게 입을 맞춰서도 아니고, 말 때문도 아니었다. 심지어 태자가 남자기 때문도
 아니었다. 문제는 바로 태자의 키스테크닉이 만족스럽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태자는 타박에도 아무렇지 않게 혀를 내밀어 레인의 붉은 입술을 핥았다. 레인의 거부하는 손길에 밀려나는 순간에도
 히죽거리는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해 본 적이 없으니 서툴 수밖에.”
 “서, 설마 지금 동정이라고 말하고 있는 거야?”
 “응. 그대 외에는 아무도 안고 싶지 않아서.”
 “........맙소사......”

 태자가 순결을 지킨 이유 같은 것은 전혀 상관없이 그가 처녀라는 것에 놀라 주춤 했던 레인은 정신을 차리자마자
 깔깔대며 웃어 제쳤다. 눈꼬리에 눈물이 맺힐 만큼 통쾌하게 웃었다. 온 나라 여자들을 독식 할 것만 같던 잘생긴
 청년이 스물여의 나이를 먹도록 여자의 가슴 한번, 입술 한번 탐하지 않았다. -십대 중반에 몽정을 치르자마자 여자를
 안았던 레인의 정신세계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태자를 질투하고 미워했던 마음이 조금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레인에게 태자는 더 이상 안중에 없었다. 라이벌도
 아니고, 위기감을 가질 적도 아니었다. 원한은 절대로 잊지 않는 본성 탓에 미움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이미 ‘이겼다’는 마음이 자리 잡아 너그러워졌다.
 한참을 웃던 레인은 흐뭇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태자를 향해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가늘게 뜬 눈은
 음탕하고 관능적인 시선을 만들었다.

 “정말 가엽군. 여자를 안지 않는다면, 무슨 재미로 살지?”
 “글쎄? 그대는 이제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 거지?”

 기분 좋게 웃던 레인은 태자의 입에서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었다.

 “그대는 이제 여자를 안을 수 없는데.”
 “뭐, 뭐, 뭐라구?”

 말을 더듬는 레인을 태자가 의기양양하게 바라봤다. 씨익 웃는 폼이 개구쟁이 같았다.

 “그대는 내 소유가 되었잖아. 이 몸도, 마음도, 아름다운 머리카락 한 올까지도 다 내가 가졌으니, 그대가 죽을
 때까지, 오직 나만이 그대의 몸을 핥고 빨고 안고..... 아, 생각만 해도 기쁘군.”
 “..... 농담이지?”
 “내가 뭐 하러 그대의 무례함까지 참는다고 생각해?”

 레인은 이 방을 봤을 때부터 태자가 자신을 안으려 한다는 것은 알았다. 침실에서 사람 둘이 할 일이란, 어디까지나
 뻔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설령 남자 둘이라고 하더라도.
 하지만 이런 소유욕을 보일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남자는 좋아하지 않지만 한번쯤이라면 못할 것도 없지, 했던
 마음이 눈 녹듯 사라지는 것 같았다.

 “너 정말... 제 정신 아니지?”
 “마빈과 똑같은 말을 하는군. 글쎄, 어떨까?”

 그가 최소한 정상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순간, 레인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레인에게는 가족도, 친구도, 세상
 무엇도 잃는다고 해서 아쉬울 것이 없지만, 단 하나. 난잡한 성생활만큼은 포기 할 수 없는 최후의 것이었다.

 “말도 안 돼! 그럼 내 성욕은 어떡해? 오르가즘은 어쩌냐구!!”

 금방이라도 실신 할 것 같은 표정으로 절박하게 외쳤다. 레인에게는 노예가 되었다는 말보다 수천배는 타격이 컸다.
 태자가 레인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며 느긋하게 염장을 질렀다.

 “내가 처리해 주면 되잖아?”
 “하, 고까짓 테크닉으로? 웃기지마 이 멍청아! 키스도 제대로 못하는 주제에!”
 “조금만 가르쳐주면 금방 잘 할 수 있어.”

 자신감에 넘쳐서 말하는 태자의 잘생긴 얼굴에 레인은 더 화가 났다.

 “가르친다고 네 가슴이 커지는 것도 아니잖아!!!”

 버럭 외치자마자, 저도 모르게 태자의 건장한 몸에 풍만한 가슴이 달린 것을 상상하고선 비위가 상해 오만상을
 찌푸렸다. 왜 자신이 이런 엄한 상상을 해야 하는 건가, -레인은 눈물이 날 것 같이 서러워졌다.
 레인이 고통스러워하는 표정에 킬킬거리며 웃던 태자가 머리카락에 힘을 줘 레인의 귓가를 핥았다.

 “큰 가슴을 좋아하게 된 거야? 그대는 별로 그런 것에 구애받지 않았잖아.”
 “네가 뭘 알아?”

 레인이 독살스럽게 쏘아붙였다. 사실이긴 하지만, 딱히 태자가 알고 있을 정도로 소문날만한 일은 아니었다. 그는
 확실히 한부분에 집착하지는 않았다. 얼굴이 예쁘거나, 몸매가 좋거나. 혹은 테크닉이 뛰어나거나, 목소리가
 간드러지거나..... 뭐든 하나라도 괜찮다면 즐겼다. 구멍에 귀천이 없다는 것은 이런 것에도 적용되었다. 그리고 사실,
 굳이 따진다면 가슴보다는 얼굴 쪽이기도 하다.
 정곡을 찌른 태자가 얄미워 레인은 눈을 가늘게 뜨고 태자의 회색 눈을 노려봤다.
 태자는 오만방자한 레인이 귀여워 죽겠는지 연신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귀를 핥는다.

 “하긴. 그대가 큰 가슴을 좋아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지. 아쉽겠지만 좋아하지 않는 쪽으로 자신을 변화시켜 봐.
 그대가 평생 만져야 할 내 가슴은 밋밋한 편일 테니.”
 “싫어!!!”
 “그대의 의사는 별로 중요치 않아. 이왕이면 좋아하는 게 나을 거란 거지 싫어한다 해도 그 예정에는 변함이 없어.”

 레인이 입술을 깨물었다. ‘흥, 내가 언제는 허락받고 섹스 했는줄 알아?’ 하며 통렬하게 비웃어 줬다면 좋았겠지만,
 예언 같은 통보에 몸만 부들부들 떨었다. 태자가 못하게 막는다고 여자를 만날 방법이 없을 리는 없었다. 하지만....

 “키스를 가르쳐줘.”

 입술을 맞부딪히며 하는 태자의 말에 레인이 짜증스러운 시선을 건넸다. 할 마음이 생겨야 하지, 불쾌감으로 가득 차
 있는데 대뜸 입술을 맞댄다고 키스가 아닌 것이다. 재촉하는 태자의 손길에 레인이 눈가를 잔뜩 찌푸린 채 입술을
 겹쳤다.

 “망할.”

 태자는 레인의 풍성한 속눈썹 사이로 사라지는 경멸어린 눈초리에 아쉬움을 느꼈다. 하지만 곧 이어 들어오는
 부드러운 혀의 느낌에 아쉬움은 사라졌다.
 레인의 키스 테크닉은 물론 발군이었다. 지금까지 지나쳐온 수많은 여자들과의 노하우가 그의 혀에 고스란히 축적되어
 있었다.
 혀가 부드럽게 얽히고 쓰다듬고, 타액과 숨이 오고가는 그 찰나의 동작들이 치열하게 이어졌다. 태자의 혀를 자극시켜
 움직이게 하고 인도했다. 포개어진 입술을 빨고 치열을 핥고 혀를 얽는 그 과정들을 진행 시키는 동안 단순한 레인은
 서서히 그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저 혀를 넣는 것 밖에 모르던 태자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킬킬 천박하게 웃으며 혀와 입술을 달콤하게
 움직였다. 가르쳐 주면 잘 할 수 있다는 말은 허풍이 아니었던 듯, 태자는 단숨에 레인의 혀를 받아 호응했다. 키스를
 하던 레인이 저도 모르게 낮은 신음을 뱉고는 놀랐을 정도로 태자는 좋은 학생이었다.
 격렬해져가는 키스 속에서 레인은 아찔함을 느끼며 태자의 귓가를 쓸었다. 부드러운 금색 머리카락을 유혹적으로 쓸어
 넘기고 뜨거운 목선을 잡았다. 태자의 부드러운 피부와 탄탄한 근육은 키스에 집중해서 인지 거부감이 일지 않았다.
 황홀한 키스로 반쯤 발기한 레인에게는 눈앞의 사람이 누군지는 중요치 않았다. -방금 가르친 것이지만- 키스
 테크닉이 괜찮고 피부가 부드럽고, 얼굴도 남자답긴 하지만 미형이고.... 어차피 지금 당장은 꼴리는 여자도 없으니,
 좀 더 가르쳐 주고 잘 하게 만들어서 봉사를 받는 것도 꽤 괜찮은 일이다 싶었다.
 태자의 아랫입술을 강하게 빨아올린 레인은 그의 목으로 입술을 옮겼다.

 “나는 여기가 좋아.”

 레인은 정신이 반쯤 나가버린 듯 쉰 목소리로 낮게 속삭이며 태자의 목에 이를 박았다. 아름다운 노란 눈에 욕정이
 가득 담기자 눈꼬리가 붉어지며 말도 못하게 색기가 어렸다. 레인이 태자의 셔츠 위 가슴 아랫부분을 손으로 훑으며
 키스했다.

 “여기도. 그리고.....”

 배꼽 주변을 어루만진 손은 순식간에 태자의 허벅지에 가 닿았다.

 “이쪽을 이렇게..... 능숙하게 터치해주면 그대로 간다구.”

 천 위를 쓸어내리며 시선을 올린 레인은 밑에 깔린 태자를 야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태자의 잘생긴 얼굴에는 어느새
 그 건달 같은 웃음이 사라져 있었다. 회색 눈은 기이한 충동을 느끼는 듯 혼탁했고 입술은 굳어 있었다. 화난 것 같은
 태자를 보며 레인은 비웃음 같이 야릿한 것을 입가에 걸고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았다.
 레인은 여자에게 하듯 태자의 얼굴을 양 손으로 감싸며 입을 맞추고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눈꼬리를 내려
 깔며 거만하게 웃었다.

 “이렇게 부드럽게, 아기를 안듯이 서.,,,,.윽!”

 태자가 자신의 위에 있던 레인을 끌어내려 침대 바닥에 내팽개치고 그 위로 올라타며 짐승처럼 으르렁 댔다. 굶주린
 사자처럼 핏발서 살기어린 눈으로 레인의 셔츠 단추를 뜯어내고 목덜미를 물었다.

 “무슨 짓이야? 끅... 이봐!”

 태자는 잡아먹을 것처럼 으르렁거리며 레인의 몸을 탐했다. 버둥대는 두 팔을 강하게 옥죄고 가슴을 깨물고 질겅질겅
 씹는다.

 “아파! 아프다고! 익!”

 태자가 붙잡는 곳마다 아픔을 느낀 레인은 강하게 잡힌 팔을 애써 빼내 그를 밀어내며 소리를 질렀다. 우악스러운
 태자의 손에 잡힌 레인의 하얀 피부가 발갛게 물들어갔다.

 “난 고통을 즐기는 취미는 없어!”

 아무리 자의대로 하는 섹스는 아니라지만 이렇게 되면 강간과 다를 바 없다. 그런 생각을 하자 울컥하고 뜨거운
 뭔가가 속에서 치고 올라왔다. 레인의 고고한 자존심에 커다란 타격이 가해진 것이었다.
 감히 처녀 주제에.... 섹스 앞에서는 져본 적도, 절대로 지고 싶지도 않은 레인이 처녀에게 일방적으로 당하는
 성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그 어떤 말보다 굴욕적인 일이었다. 온통 굴욕적인 일들 투성이지만, 이건 레인의 프라이드를
 통째로 흔드는 일이었다. 태자를 진정시키기 위해 뺨을 때리고 소리를 질렀지만 본인 자신도 냉정치 못한 상태라서야
 통할 리가 없었다. 오히려 태자는 더 흥분 한 듯 싶었다.

 “빌어먹을! 이 악마 같은 놈! 그렇게 넣고 싶으면 호박에 구멍 뚫어서 집어넣어!”
 “가만히 있어.”

 태자가 으르렁거렸다.

 “어디다 소리를 지르는 거야? 악! 아파! 아프다구! 이런, 망할! 그 고상하지 못한 물건 저리 치우지 못해?”

 소리를 지르는 것은 태자가 아닌 레인이었지만 그의 저밖에 모르는 자체 필터는 온 몸으로 태자를 비난하고 있었다.

 “안 해! 비켜!”
 “세상 온 여자에게 열려있는 네가 나랑은 왜 안 해?”

 넌 너무 못해, 하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기도 전에 태자의 손이 그의 목을 틀어쥐었다. 레인의 주먹이 그의 가슴을
 치고 할퀴고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죄는 손이 강해지자 레인이 헐떡이며 주먹 쥔 손을 더 이상 들어 올리지 못하고
 바들바들 떨었다. 그제야 태자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손을 뗐다.
 바지와 속옷을 벗기는 태자를 한참동안 이글이글한 눈으로 노려보던 레인은 태자가 배꼽을 무는 순간 그의 눈을 향해
 무릎을 세워 차고 후다닥 일어나 문으로 달려갔다. -지만 침대를 채 벗어나기도 전에 발목이 잡혀 침대에 거칠게
 내동댕이쳐졌다.
 한참을 엎치락뒤치락 했다. 태자가 훨씬 힘이 셌지만 레인이 있는 힘을 다해 반항했고, 태자는 비교적 그를 잡는
 것에만 힘을 쓴 까닭에 그 공방은 꽤나 오랜 시간 이어졌다.
 온 몸이 땀으로 젖고 숨이 차서 말도 제대로 잇지 못했지만 레인의 반항은 점점 거세지기만 했다.

 “헉.. 이 짐승! 헥..헥.. 저리 가! 헥.. 저리..,,,.. 가라구!”

 레인의 버둥대는 두 팔을 한손으로 잡고 차가운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던 태자가 침대 맡에 종을 울렸다. 태자가
 시종을 부르느라 손이 느슨해진 사이 레인은 탁자로 손을 뻗어 화병을 잡았다. 태자의 머리를 향해 내리 치려던 것이
 손에 힘이 빠져 침대 맡으로 굴러가 깨졌다.
 태자의 부름에 문을 열고 들어서려던 마빈은 들어서자마자 들리는 굉음과 욕설에 귀를 막고 얼굴을 찡그렸다.

 “마빈! 밧줄가지고 와!”
 “이 악마 새끼! 윽.. 헥.. 죽여버릴거야!”

 아이고 두야. 마빈이 애써 웃으며 상황을 진정시키려 태자를 말려봤다.

 “저... 밧줄은 좀... 그렇지 않겠습니까? 두 분이서 치루는 첫날밤인데...”
 “잔말 말고 가져와!”
 “망할! 너도.... 죽여 버릴거야!”

 말을 좀 덜하면 좀 더 힘차게 반항해서 태자도 찍어 누를 수 있지 않을까. 자신에게도 저주와 욕설을 퍼붓는 레인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에 혀를 찬 마빈은 시종을 시켜 비단 끈은 준비 했다.
 마빈은 ‘정말 이런 일까지 해야 하는 걸까’ 하는 자괴감을 느끼면서도 직접 가져다주고 레인의 팔을 묶는 것까지
 협조 했다.
 레인은 두 팔이 묶이면서도 전혀 굴하지 않고 눈앞에 두 남자를 무시무시한 눈으로 노려봤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 그러지 않아도 그대는 섹시해.”

 두 팔이 묶여 침대에 누워있는 레인의 이마에 붙은 머리카락을 쓸어주며 태자는 실실 쪼갰다. 이를 앙다물었던 레인이
 타협을 하자는 듯 한숨 섞인 목소리로 간절하게 말했다.

 “안 돼. 강간은 안 돼. 제대로 봉사 하던가, 아니면 내가 리드하게 해줘!”
 “........역시 보통 사람하고는 사상이 전혀 다르군요.”

 마빈은 감탄했다.
 태자가 회색 눈을 둥글게 휘며 흐뭇하게 웃고는 속눈썹을 바르르 떠는 레인을 보며 고민하는 척을 했다.

 “글쎄, 어떻게 할까?”

 태자의 얄미운 말에 마빈은 덩달아 흥미진진해져서 레인을 바라보았다. 레인이 과연 그 고고한 자존심에 애원을 할까?
 태자의 눈치를 보던 레인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든 것이었다. 레인은 기본적으로 저
 잘난 맛에 사는 사람이다. 비록 사정이 이래서 그제는 태자의 발에 매달려도 보았지만, 아무 때나 비굴한 사람은
 아니었다. 이도 저도 택하기 싫은 상황에서 맨 정신으로 자존심까지 버리려 하니 굴욕감에 심장이 뜨거워졌다.
 태자가 그 마음을 아는 듯 선택하기 쉽게 참견해 왔다.

 “그냥 내 마음대로 할까?”

 상대가 그의 몸을 뒤집어 눕혀 속옷이 반쯤 벗겨져 드러난 뽀얀 엉덩이를 변태 노인처럼 주물럭거리고 깐죽대자
 레인이 숨을 몰아쉬며 눈을 내리 깔았다.

 “전하, 제발....”

 강간당하는 것 보다야.....
 레인이 애원하려 하자 마음이 약해지는 것을 느낀 태자가 말을 끊었다.

 “싫어.”

 레인의 아름다운 입꼬리가 분노로 씰룩였다.




 8.


 이렇게 된 이상 반드시 느끼는 척, 즐기는 척 해주마. 하고 속으로 수 없이 되뇌었던 다짐이 모두 물거품이 되고
 있었다.

 “악.... 히익...”

 내장을 밀어올리며 들어오는 거대한 물건에 레인은 온 몸을 뻣뻣하게 굳힌 채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목구멍에
 걸린 듯 잘 나오지 않는 숨을 뱉을 때 마다 비명도 아닌 이상한 괴성이 꺽꺽대며 그의 귀를 울렸다.
 손가락을 넣을 때만해도 이물감을 참으며 ‘괘, 괜찮은 느낌이네?’ 하고 자신만만(?) 하게 말했었지만 태자의 페니스
 앞부분이 들이밀어지자 얼굴이 하얗게 되며 입을 못 열더니 이윽고 반쯤 들어가자 눈도 못 뜨고 육지로 건져진
 붕어처럼 숨만 뻐끔거리게 됐다.
 태자도 조금은 힘든 듯 마른 입술을 핥으며 도전적인 눈으로 레인을 내려 봤다. 태자가 허리를 잡고 조금씩 안으로
 밀고 들어갈 때마다 레인은 새빨갛게 된 눈가를 덜덜 떨었다.

 “레인. 힘 빼봐.”

 태자의 낮은 목소리는 레인에게 전혀 들리지 않았다. 오직 그가 들어오는 것에만 온 신경이 몰려 있는 레인의
 머릿속은 고통스럽다는 생각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태자는 잠시 고민했다. 고통스러워하는 레인도 충분히 예쁘지만 이대로 밀고 들어가면 상대가 기절할 것만 같았다. 안
 그래도 레인이 두 눈을 꼭 감고 있어 그 노란 눈을 볼 수 없다는 것이 몹시 아쉬웠던 참인지라 무턱대고 밀어 붙일
 수는 없었다.
 태자가 고민하는 순간에도 레인은 곧 까무러칠 듯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켁켁 댔다.
 첫 시도인 만큼 기절한 레인을 붙들고 혼자 하고 싶지는 않았던 태자는 잠시 눈을 흐리며 레인이 좀 전에 말했던 그의
 성감대를 기억해냈다. 좀 전 키스 했을 때 그의 몸이 부드럽게 풀어졌던 것을 떠올리며 입을 맞췄다. 고통을 참으려
 앙다물고 있는 입술을 애써 열며 농염하게 혀를 굴렸다. 단단하고 거친 손으로 그의 허리를 만지고 허벅지 사이에
 레인의 중심을 움켜쥐었다.

 “힉!”

 태자의 손에 레인이 눈을 번쩍 떴다. 잠시 놀라 몸을 움츠렸지만 곧 고통이 밀려오는 듯 커다랗게 떠진 눈에 눈물이
 빠르게 고여 떨어졌다.
 그 눈물을 혀로 핥고 목덜미를 이로 긁자 레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엉엉 울기 시작했다. 정신이 없을 만큼 심했던
 고통이 온몸 구석구석으로 찌릿하게 퍼지고 있었다.
 레인의 몸에 힘이 풀리자 태자가 멈췄던 진행을 다시 시작했다. 아니, 지금이 아니라면 물러서야 하는 절체절명의
 전장에라도 나선 듯 단숨에 안으로 파고들었다.

 “아...! 으... 히익,,,!”

 레인의 머릿속으로 무언가 찢어지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시트가 붉게 젖기 시작했다. 레인의 피가 윤활유를 더 해
 안이 질퍽거렸다.
 자신의 밑에서 가련하게 울부짖는 레인을 보며 태자는 사나운 짐승처럼 으르렁대며 허리를 움직였다. 그의 눈에
 흉포한 갈증이 토해질듯 이글거렸다.

 “힉! 끄윽..! 제발.. 크흡!”

 레인이 헐떡대며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딱히 태자에게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 평소에 통렬히 비웃었던 신이든
 지푸라기든 붙잡고 매달리고픈 심정이었다.
 이미 이성을 잃은 태자는 레인의 몸에 파랗게 멍이 남도록 옥죄며 헉헉 거친 숨과 욕정을 내뱉었다. 그의 허리
 움직임이 점점 속도를 붙여나갔다. 레인의 자지러질듯한 비명이 문밖으로 새어나갔고 시트를 부여잡은 손과 허리에
 묶인 붕대에서도 피가 흥건히 배어나왔다.
 태자의 이마에 맺힌 땀이 레인의 하얀 가슴에 떨어졌다.
 우악스러운 출입에 눈을 하얗게 뒤집은 레인의 울음이 갓난아기의 것처럼 무력했다.
 태자가 거친 숨을 내뱉고 미간을 찌푸리며 사정한 순간, 레인은 숨을 크게 들이켰다. 자신의 몸속에서 그의 액이
 분출되는 느낌이 선명하게 등줄기를 타고 와 온 몸을 바르르 떨게 만들었다. 태자가 그 위로 쓰러지듯 눕자 축 늘어진
 레인의 페니스는 사정은커녕 평소보다 쪼그라든 모습으로 흔들렸다.
 태자의 발기가 끝나서 조금 덜 아파진 레인은 몸을 둥글게 말며 태자의 머리카락을 붙잡고 엉엉 울었다. 혼자만
 즐기다니!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가 있을까.... 환멸이 느껴졌다. 자신은 처녀를 안으면서 한 번도 무례했던 적이
 없었다. 다정하고 부드럽게 충분히 시간을 들여서 상대도 즐겁고 자신도 즐겁게 하려 노력했는데.... 자신이 한만큼
 대접받지 못했다는 억울함과 고통에 목 놓아 울었다.

 “허어엉.... 엉엉.. 흐윽.. 끅..”

 묶인 두 손에 흥건한 피가 태자의 황금색 머리카락을 붉게 물들였다.
 죽여 버리고 싶다는 마음을 담은 레인의 반항을 ‘매달림’으로 받아들인 태자가 크크, 비열하게 웃으며 그의 팔과
 어깨를 이로 물었다. 우는 것을 달래려는 건지 애무 같은 그의 몸짓에 울던 레인은 당황했다. 몸에 들어와 있는
 태자의 페니스가 움직이고 슬슬 커지는 것이 소스라칠 만큼 뚜렷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레인이 손에 잡은 머리카락에 힘을 줬다.

 “하.. 하지...히끅.”

 가슴을 빨던 태자가 고개를 들어 눈물 콧물 흘리는 레인과 눈을 마주쳤다. 그만 두라고 말하는 그의 표정은 태자를
 자극했다.
 회색 눈이 능욕적인 미소를 짓는다.
 레인은 짙은 현기증을 느꼈다. 그의 동공이 작아지는 모습이 흡사 먹이를 앞에 둔 짐승 같았다. 그 시선에 압도당해
 눈을 감았다. 레인은 자신의 모든 앞이 캄캄한 것을 알았다.



 * * *



 “..... 겁니까?.. 아...... ...도 잘 부탁...”

 누군가 주변에서 종알종알 대는 소리에 레인은 오만상을 구기며 눈을 떴다. 살풋 뜬 두 눈으로 찌르듯 강한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 으...”

 목소리가 거의 나오지 않았다. 입을 열고 목에 힘을 주자 성대를 칼로 도려낸 것처럼 찌르르한 고통이 일었다. 퉁퉁
 부은 눈도 제대로 떠지지 않아서 레인은 열에 들뜬 멍한 머리로도 거울을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 깼구료.”

 눈을 찡그려 봐도 초점이 맞지 않아 누군지 알아 볼 수가 없었다.

 “마빈이오. 거 뭐... 괜찮소?”

 안 보인게 다행이었다. 그 얄밉게 퍼져서 웃고 있는 얼굴을 보면, 없던 병도 생길 것 같았다. 레인이 ‘저리 꺼져라’
 는 듯 몸을 돌려 눕자, 마빈이 주변 사람들을 향해 나가보라고 손짓하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전하와의 첫날밤은 그다지 황홀하지 못했나보오?”
 “끝내줬어.”

 레인이 돌 굴러가는 목소리로 발끈하며 대답했다.

 “그래, 그렇게 끝내줘서, 천하의 레인 경께서 지혜열을 다 앓으시는구료.”

 이 씨발놈이. 사정 다 알면서 갈구는 마빈이 얄미워 레인은 이불 속에서 주먹을 꼭 쥐었다.

 “좋았... 어. 정말. 정말 좋았어.”

 딱히 반어를 하려던 것은 아니었지만, 돼지 멱따는 비명이 문 밖까지 들렸던 것을 기억하면 면구한 상황이었다.
 쯧쯧 혀를 찬 마빈이 레인의 말을 못 들은 척 신세한탄 같은 말을 시작했다.

 “하긴, 오죽 짐승 같아야지. 곱게 키워서 그런지 순 저밖에 모르는 게... 간밤에 어땠을지 눈에 훤하오. 뭐 보나마나
 심하게 들이댔겠지.”

 맞아, 맞아! 말도 못하고 혼자 품고 있던 부분을 마빈이 시원하게 긁기 시작하자 레인은 돌아누웠던 몸을 살짝
 일으켰다. 힐끔 마빈을 보자, 그는 고개를 잘래잘래 흔들며 ‘네 맘 다 이해해.’ 오라를 풍겼다.

 “사실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이지, 물건이나 작나? 그 흉물스러운 걸 자랑스럽게 내놓고 들이대는 게 또 정말 짐승
 같은 부분이잖소. 귀여운 점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고. 윽.. 난 상상만 해도 괴로운데, 직접 그 괴물을
 상대한 경은 오죽 했겠소?”
 “........”
 “그러게, 성교 하면서 혼자만 들이대는 거 아니다, 누누히 강조하며 섹스 파트너를 찾으라고 수번을 말해도...”
 “섹스를 안 권한 것도 아니란 말야?”

 불쑥 레인이 끼어들었다. 레인의 컬컬한 목소리가 안쓰러운 듯 마빈이 그에게 물을 건네며 한숨을 쉰다. 그 모습이 또,
 동병상련의 친절 같아서 마음이 약해진 레인은 마빈 쪽으로 좀 더 고개를 돌렸다.

 “말이라고 하오. 권하다 뿐이겠소? 내 설득하다 못해 협박하고 애원해 봐도, 그 놈의 똥고집은 또 왜 그리 센지-.
 누가 상주는 것도 아닌데 왜 저 혼자 정절은 지킨다고 오바를 떠는지, 원. 사실 말인데,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사내가 동정인 게 어디 자랑할 일이오?”
 “아니지. 남부끄러운 일이지. 다가만 가도 여자들이 다리를 벌려오는 요즘 시대에 동정이라니....”

 따뜻한 물을 힘겹게 넘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무도회 날도 그래, 경에게 춤추자고 들이댄 것 생각해 보시오. 완전 무대포가 따로 없다니까. 제정신으로 누가
 그런 짓을 하겠소? 취향은 또 왜 그리 유난을 떠는지. 주제에 눈은 높아서.... 제 약혼녀랑도 안 자더니, 경이 제
 것이 됬다니까 냉큼 들이대는 꼬라지 좀 보오.”
 “놈이 눈이 높은 것 같긴 해.”
 “.......여튼. 내 전하를 모시고 있긴 하지만, 월급만 조금 줬어도.....”

 자신이 먼저 꺼낸 말이긴 하지만 콧대 세우는 레인의 말에 굳이 동조해 주고 싶지는 않아서 애써 말을 돌렸다.
 사실은 속셈이 있어서 그에게 말을 걸었지만 점점 넋두리가 되어 갔다. 시간이 좀 더 흐르자 대화는 태자의
 인신공격으로 치닫고 있었다.

 “눈빛이 완전 재수 없다니까!”
 “어찌나 건들거리는지 뒷골목 건달이 형님, 할 것 같다오.”
 “실실 쪼개는 건 또 어떻고?”
 “어허, 정말 ‘태자’ 만 아니라면 확 멱살 잡고 탈탈 흔들고 싶은 충동을 하루에도 열 두번씩 느끼오.”
 “내 말이!”

 생각만 해도 혈압이 오르는 듯 레인의 얼굴이 붉어져 고운 이마에 핏대가 솟았다. 간밤에 기절한 뒤에도 계속 붙어
 오입질을 하던 태자가 생각나자 기어이 뒷목을 잡고 침대에 털썩 쓰러져 누웠다.
 침대에서 밤꽃향기가 났다. 그 향기에 진저리를 치며 상처 난 입술을 씹었다.

 “얼마나 추접스럽게 여기저기 침을 묻혀 대는지.... 자고 일어났는데 가슴에 허옇게 침자국 말라붙어 있는 느낌 알아?
 새벽에 내가 얼마나 기겁 했는지....”

 레인의 말에 추임새를 넣기 위해 입을 열었던 마빈은 그대로 잠시 얼었다. 그런 걸 내가 어떻게 알아? -라는 말이 혀
 위에서 움칠 움칠 했다.

 “......몰라?”

 네. -둘 사이에 찬바람이 불었다. 사실 마빈도 레인의 얼룩덜룩한 가슴에 묻은 하얀 자국을 보긴 했었다. 하지만 그건
 절대로 침이 아니라 정액 자국이었다. 능청스러운 성격이지만 의외의 곳에서 허를 찔리면 말문이 막히는 마빈은
 황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에 레인이 짜증을 부리며 고개를 팩 돌렸다. 동조 되지 못한 것이 부끄러운 듯 귀 언저리가 붉어져있었다.

 “흠흠. 깜빡 할 뻔 했구료. 이 말을 전하러 온 것인데.”

 이미 고개를 돌린 레인은 할 말 하고 어서 가라는 듯 딴청을 피웠다.

 “내일 저녁에 공식적으로 경의 신분 박탈이 공표될 게요.”
 “이미 된 것 아니었어?”
 “파티가 한창인데 그런 흉흉한.. 크흠, 여튼 좋은 소식도 아닌데 일찍 발표해서 찬물을 끼얹을 필요는 없잖소.
 덕분에 오늘까지도 귀족 대접 받았을 테니 경으로서도 나쁠 건 없잖소?”

 흠, 모레부터는 경을 뭐라 불러야 하겠소? 깐죽대는 마빈을 못 본 척 하며 레인은 그제야 다급히 물었다.

 “우리 집안에는 연락을 한 것인가? 전령이 오진 않았나?”
 “아, 그게 말이오.....”

 마빈이 귀를 긁적였다. 아무리 할 말 못할 말 가리지 않는 그지만, 그래도 사람인지라 말하기 곤란한 게 있었다. 특히
 이런 기대에 찬 눈에 반대되는 말을 해야 할 때면 괜히 자신이 죄를 지은 듯 미안한 감정이 들기 마련이었다. 그래도
 말하지 않을 수는 없는 법. 레인의 재촉과 닦달에 못 이겨 말문을 열며 한숨을 쉬었다.

 “전령이 오긴 왔소만, 에, 거... 파문 공지를 들고 왔더구료.”
 “뭐, 뭐, 뭐라구? 뭐?”

 되묻는 말에 굳이 다시 확인 사살을 하는 무례함은 범하지 않았다. 마빈은 눈을 감고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며 레인이
 받았을 충격을 생각했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 큰 눈에 눈물이 그렁하게 고여 망연한 표정을 하고 있겠....

 “이 망할! 그 암퇘지가! 엿 같은 비계 덩어리 같으니라구! 역겨운 살덩이 주제에 사람인 척 기어 다니는 게, 감히!!!”

 원색적인 욕설이 그 예쁜 입술을 뒤틀며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마빈은, 레인의 행동패턴을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했다. 태자의 취향은 도저히 이해 할 수도, 하고 싶지도
 않았다.
 마치 브레이크가 풀린 듯, 쌓였던 스트레스를 모두 쏟아내려는지 점점 강도를 높여가며 이어지는 욕설에 머리가
 아파온 마빈은 레인을 진정 시키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래서 말인데, 이제 레인경에게 붙잡을 수 있는 지푸라기는 단 하나밖에 없지 않겠소?”
 “뭐야? 하나?”

 욕설을 쏟아내던 기세로 따지듯이 묻는 레인에게서 조금 물러선 마빈은 볼로 흘러내리는 땀을 닦았다.

 “태자 말이오. 태자. 태자가 레인경을 이런 상황까지 치닫게 만들긴 했지만, 역으로 이용할 수도 있는 것 아니겠소?”

 살살거리는 마빈을 보며 레인은 미간을 찌푸렸다. 뭘 말하려는데 저리도 간신배처럼 손바닥을 비빌까 싶었던 것이다.
 하긴 별 충성심도 없이 권력자에게 붙어 머리나 굴리는 게 영락없는 간신배이긴 했다.

 “이용하다니? 태자를? 대체 무슨 속셈이지?”
 “속셈이라니, 그리 말하면 내 섭하오. 생각해 보오. 지금 이 상황에 가장 불행한 게 누구요?”

 마빈은 자신이라고 생각했지만 굳이 말하진 않았다. 레인도 꽤 불행한 편이니 그가 달리 생각한다 해서 딱히 틀린
 일도 아니었다. 생각해 보면 태자에게 얽혀서 둘 다 이래저래 괴로운 것이다.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이 특히.

 “그래서 뭘 어쩌라는 거지?”

 뻔뻔하게 코웃음 치며 말 했지만 눈동자가 조금 흔들렸다. 마빈은 그걸 놓치지 않았다.

 “뭐, 굳이 뭔가를 강요하는 것은 아니요. 그저 성에 무지하고 무관심했던 태자가 경에 몸에는 흥미를 붙인 것 같아
 걱정이 되기도 해서 말이외다.”
 “흥. 당연히 그렇겠지.”
 “흠흠, 여튼..... 경은 다시는 전하와 함께 밤을 보내고 싶지 않겠지만 너무 티내지는 말란 거요. 전하와 몸을
 섞는다면 지위가 어쨌건 간에 적당히 대접을 받을 수 있을 테지만 그도 아니면 정말 마구간이라도 쓸고 닦아야 할게요.”
 “개소리.”

 레인이 메마른 입술을 뒤틀며 서슬 퍼렇게 눈을 부라렸다. 대단한 모욕이라도 받은 듯 눈가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내가 비록 누명을 써서 그 많은 모욕을 당하게 되었다지만, 네놈에게 싸구려 충고를 받을 정도까지는 아냐. 태자의
 똥구멍을 핥든, 돼지우리를 청소하든 조언은 필요 없어. 당장 꺼져.”

 마빈은 레인의 냉담한 반응에 고개를 저었다. 레인이 손에 든 유리컵을 던질 듯 들어 올리자 히껍하여 “그럼, 또
 뵙겠소!”하고 말하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어 나갔다.
 쨍! 문이 닫히기가 무섭게 잔이 날아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파편이 사방으로 구르는 소리도 함께였다. 문 바로
 뒤에서 마빈은 흐르는 식은땀을 닦으며 또 다시 신세의 기구함을 한탄했다.
 그래도 이만하면 알아들었겠지. 속으로 칼을 갈던 방패를 닦던, 제발 좀 그만 싸웠으면 싶다. 고래 싸움에 낀 새우인
 마빈은 등뿐 아니라 팔다리도 온통 멍투성이였다.

 “에고, 이럴 때가 아니지....”

 어제 레인에게 얻어맞아 생긴 멍을 보며 한숨을 쉬던 마빈은 돌연, 자신이 몹시 바쁘다는 것을 깨달았다. 책상 맡에
 쌓인 서류가 발에 채일 정도였다. 시 예산도 짜야 하고, 공물의 검사도 해야 하며, 태자의 발 치수도 재야 하고....
 꼰대 같은 단장을 만나 잔소리도 해야 했다. 군부단장인 자신이 왜 그런 일들을 해야 하는지 자아성찰의 시간도 갖지
 못한 채 마빈은 토실하게 살 오른 엉덩이를 뒤뚱거리며 잰 걸음으로 사라졌다.


 마빈이 나간 문을 서슬 퍼런 눈으로 노려보며 씩씩대던 레인은 곧 푹신한 침대에 드러누워 얼굴을 묻었다.

 “.......망할.”

 그의 말이 맞다. 마빈의 말은 차라리 순화 된 것이었다. 현실은 더 비참하고 냉혹할지도 몰랐다. 하나도 모욕적이지
 않은 말이었지만 그 이면에 상상되는 뼈저린 현실에 정곡을 찔려서 울컥하고 말았다.
 이제는 정말 태자가 관심을 끊을까 초조해 하고 안달해야 할지도 몰랐다. 마지막 지푸라기가 태자라니.

 “....태자 따위.....”

 아닐 것이다. 누군가 분명 자신을 도와줄 터였다. 레인은 말도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의 천사 같은 외모에 속아
 도와줄 사람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버릴 수가 없었다.

 “누구라도....”

 그게 누구라도 만날 수만 있다면, 태자에 대항할만할 사람을 찾을 수만 있다면.
 레인의 호박색 눈은 닫힌 방문을 한참이나 노려보았다.




 - 未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