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척전(조위한)

최척전(조위한)
 
  최척(崔陟)의 자는 백승(伯昇)이며, 남원(南原) 사람이다.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 숙(淑)과 함께 남원부 서문밖에 있는 만복사의 동쪽에서 외롭게 살고 있었다. 최척은 어려서부터 뜻이 크고 기개가 있었으며, 친구와 어울려 놀기를 좋아하고, 사소한 예절에는 구애를 받지 않았다. 이에 그의 아버지가 경계하여 말했다.
  "네가 배우지 않으면 무뢰한(無賴漢)이 될 터인데, 너는 장차 어떤 사람이 되려 하느냐? 하물며 지금 나라에 전쟁이 일어나 바야흐로 고을마다 무사(武士)를 징집하고 있는데, 너는 활쏘기나 말타기 등 무술은 익히지 않고 늙은 아비에게 근심만 끼치고 있으니 효자라고 할 수 있겠느냐? 머리를 숙이고 선비를 좇아 과거 공부를 한다면, 비록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는 오르지는 못할지라도 등에 화살을 지고 군대에 종사하는 일은 면할 수 있을 것이다. 성남(城南)에 사는 정상사(鄭上舍)는 나와 죽마고우(竹馬故友)이다. 그는 힘써 배워서 학문이 두텁고도 뛰어나며 또 처음 배우는 사람을 잘 인도하여 가르치니, 너는 성남으로 가서 그를 스승으로 섬기도록 해라."
  최척은 아버지의 명을 받들어 즉시 책을 옆구리에 끼고 문을 나서, 정사도에게 가르침을 받으며 부지런히 공부를 하고 책을 읽었다. 최척의 문장이 날로 발전하자, 마을 사람들은 모두 그의 총명하고 민첩함을 칭찬하였다.
  최척이 정상사의 집에서 공부를 할 때마다 문득 어떤 계집아이가 창 밑에 숨어서 책 읽는 소리를 몰래 엿듣곤 했는데, 나이는 겨우 16살 정도 되어 보였으며, 머릿결은 구름을 드리운 듯 아름다웠고 얼굴은 꽃처럼 어여뻤다. 하루는 상사가 식사를 하기 위해 내당(內堂)으로 들어가고 최척이 홀로 앉아서 시를 읊고 있는데, 갑자기 조그만 종이 쪽지 하나가 창 틈으로 들어왔다. 최척이 주어서 읽어보니, 곧 <표유매>의 마지막 장이 씌어 있었다. 최척은 이 글을 본 뒤부터 정신이 날아갈 듯 황홀하고 마음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두운 밤을 틈타 향기를 훔치리라고 거듭 마음을 먹었다가도 이내 김태현의 고사를 생각하면서 애써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고, 다시는 그런 생각을 하지 말자고 스스로 다짐하곤 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하고 있노라면, 마음속에서 도의(道義)와 욕구(慾求)가 서로 치고 받았다. 잠시 후에 상사가 나오는 것을 보고 즉시 그 종이 쪽지를 소매 속에 감추었다. 공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푸른 옷을 입은 계집아이가 문밖에 서 있다가 최척의 뒤를 따라오며 말했다.
  "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최척은 쪽지에 적힌 시를 보고 마음이 흔들리고 있던 차에 이 말을 듣고는 기쁘면서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고개를 끄덕여 오라고 한 후 집으로 데리고 가 마음속에 품고 있던 것을 물으니, 그 아이가 대답했다.
  "저는 이낭자(李娘子)의 계집종인 춘생(春生)입니다. 낭자가 저에게 낭군의 화답시(和答詩)를 청해 오라고 하였습니다."
  최척이 의아해서 말했다.
  "너는 정상사 집의 아이가 아니냐? 그런데 어째서 이낭자라고 말하느냐?"
  춘생이 말했다.
  "우리 주인댁은 본래 서울 숭례문 밖 청파리(靑坡里)에 있었으며, 주인 어른인 경신(景新)께서는 일찍 돌아가시고 과부인 심씨(沈氏)가 딸 하나와 그곳에서 외롭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 처녀의 이름은 옥영(玉英)인데, 시를 창 틈으로 던지고 화답시를 요청했던 분이 바로 이 분입니다. 우리는 지난 해 배를 타고 강화도(江華島)로 피난을 갔다가 다시 나주(羅州) 땅 회진에 와서 머물러 있었는데, 가을에 다시 회진에서 이곳으로 굴러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이 집의 주인은 우리 마님과 친척이라서 우리에게 매우 잘해 주십니다. 또 장차 낭자를 위해 혼처(婚處)를 구하려고 하는데, 아직 마땅한 혼처를 구하지 못하고 있는 터입니다."
  최척이 말했다.
  "너의 낭자는 과부의 딸로서 어떻게 한문(漢文)을 알게 되었느냐?"
  춘생이 대답했다.
  "낭자에게 득영(得英)이라는 언니가 있었습니다. 그 분은 문장에 능했으나, 19세라는 젊은 나이에 시집도 못 가고 일찍 죽었습니다. 우리 낭자는 항상 언니 곁에서 입과 귀로 글을 주워 들어 거칠게나마 이름을 쓸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최척은 춘생에게 술과 음식을 대접하고, 이어서 화려한 문체로 답서(答書)를 써 일렀다.
  아침에 받은 훌륭한 글은 실로 저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게다가 곧이어 청조(靑鳥)를 만나게 되니 제 기쁨을 어떻게 다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매번 거울 속의 그림자에만 의지하고 그림 속의 참모습은 불러내기 어려웠습니다. 님을 사모하는 마음은 유혹할 수 있고 상자 속의 향기는 훔칠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봉산으로 가는 길은 멀고 약수는 건너기 어려웠습니다. 어떻게 할까 이리저리 고민하고 궁리하는 사이에 이미 얼굴은 누렇게 뜨고 목덜미는 말라 비틀어졌습니다. 주저하며 잠을 이루지 못하니, 애가 끊는 듯하고 넋은 사라지는 듯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오늘 빙간의 말과 양대의 비가 홀연히 꿈속에 들어오고 서왕모(西王母)의 편지가 문득 전해져, 갑자기 성기의 만남을 이루고 월노의 끈을 맺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제 삼생(三生)의 소원이 거의 다 이루어졌으니, 동혈지맹을 번복하지 마십시오. 글로 말을 다 표현하지 못하는데, 말인들 어떻게 마음을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옥영은 편지를 받고 매우 기뻤다. 그래서 다음날 또 답장을 써서 춘생에게 전달케 하였는데, 그 글에 일렀다.
  저는 서울에서 생장하였으나 일찍 부친을 여의고, 지금껏 형제도 없이 홀로 편모(偏母)를 모셔왔습니다. 몸은 비록 영락였으나 마음은 빙호같으며, 거칠게나마 맑고 깨끗한 행실을 알아 대문 앞에 있는 길가마저도 나가 본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좋은 때를 만나지 못하여 세상살이에 어려움이 많고, 전쟁이 어지럽게 일어나 온 가족이 흩어져 떠돌다가 이곳 남쪽 땅까지 이르러 친척에게 몸을 의탁하고 있습니다. 나이는 이미 시집 갈 때가 되었으나 아직 받들어 공경할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항상 옥이 난리에 부셔지거나 구슬이 강포한 무리에게 더렵혀질까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또 이 때문에 늙으신 어머님께는 근심을 끼치고, 제 스스로도 몸을 보전하기가 어려워 슬프기만 합니다. 그러나 사라(絲蘿)가 반드시 교목(喬木)에 의탁하듯이 여자의 백년고락(百年苦樂)은 실로 남자에게 달려 있으니, 진실로 교목처럼 훌륭한 남자가 아니라면 제가 어떻게 결혼할 마음을 둘 수 있겠습니까? 가까운 곳에서 낭군을 뵈오니, 말씀이 온화하고 행동거지(行動擧止)가 단정하며, 성실하고 진솔한 빛이 얼굴에 넘쳐흐르고, 우아한 기품이 보통 사람보다 한결 빼어났습니다. 만약 제가 어진 남편을 구하고자 한다면 낭군 외에 달리 누가 있겠습니까? 저는 용렬한 사람의 아내가 되기보다는 차라리 군자(君子)의 첩(妾)이 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제 비천한 자질을 돌이켜 보면 군자의 짝이 되지 못할까 두렵기만 합니다. 어제 제가 시를 던진 것은 실로 저의 음란함을 깨우쳐 보이기 위함이 아니라, 단지 시험삼아서 낭군의 의향을 탐지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비록 지식은 없으나 원래 사족(士族)으로서 애초에 저자에서 노니는 무리가 아닌데, 어떻게 담벼락에 구멍을 뚫고 몰래 만날 마음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반드시 부모님께 아뢰어 마침내 예(禮)에 따라 혼례를 치른다면, 비록 먼저 사사로이 시를 던져 스스로 중매하는 추태를 범했으나 정절과 신의를 지키어 거안지경을 다하고자 합니다. 이미 사사로이 편지를 주고받아 그윽하고 바른 덕을 크게 잃어버리긴 했으나 이제 간과 쓸개가 비추듯 서로의 마음을 잘 알게 되었으니, 다시는 함부로 편지를 보내지 않겠습니다. 이제부터는 반드시 중매를 두어 제가 행로했다는 비난을 받지 않도록 해주시길 간절히 바라오니, 잘 생각하시어 일을 꾀하십시오.

(중략 - 서로 뜻이 통한 최척과 옥영은 주변의 반대나 걱정을 무릅쓰고 우여곡절 끝에 혼약을 맺는다. 혼인을 기다리던 최척은 임진왜란을 맞아 부득이 의병장 휘하에 들어간다. 그 사이를 틈타 부자 양생이 옥영을 아내로 맞으려고 계교를 쓰니 피하기 힘든 상황이 된다. 그러자 옥영은 자결을 시도하게 되고, 그 소문이 나자 의병장이 최척을 보내준다. 최척은 옥영과 결혼한 후 금슬좋게 생활하면서, 맏아들을 낳아 이름을 몽석이라 짓는다.)

  정유년 8월에 왜구(倭寇)가 남원을 함락하자 사람들이 모두 피난 가 숨었으며, 최척의 가족들도 지리산(智異山) 연곡사로 피난을 갔다. 최척은 옥영에게 남장(男裝)을 하게 했는데, 뭇 사람에 뒤섞이어도 보는 사람들마다 옥영이 여자인 줄을 몰랐다. 지리산으로 들어온 지 며칠이 지나자 양식이 다 떨어져 거의 굶주리게 되었다. 최척은 장정(壯丁) 서너 사람과 함께 양식도 구하고 왜적의 형세도 살펴볼 겸 산에서 내려왔다. 최척 일행은 구례(求禮)에 이르러서 갑자기 적병을 만나게 되었는데, 모두 바위 골짜기에 몸을 숨겨 겨우 붙잡히는 것을 면했다.
  이날 왜적들은 연곡사( 谷寺)로 가득히 쳐들어가 아무 것도 남기지 않고 다 약탈해 갔다. 최척 일행은 길이 막혀 3일 동안이나 오도가도 못하고 숨어 있었다. 왜적들이 물러가기를 기다렸다가 간신히 연곡사로 들어가 보니, 시체가 절에 가득히 쌓여 있고 피가 흘러 내를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 숲 속에서 신음소리가 은은히 들려왔다. 최척이 달려가 찾아보니, 노인 몇 사람이 온 몸에 상처를 입고 신음하고 있었다. 노인들은 최척을 보자 통곡하며 말했다.
  "적병이 산에 들어와서 3일 동안 재물을 약탈하고 인민들을 베어 죽였으며, 아이들과 여자들은 모두 끌고 어제 겨우 섬진강으로 물러갔네. 가족들을 찾고 싶으면 물가에 가서 물어 보게나."
  최척은 하늘을 부르짖으며 통곡하고 땅을 치며 피를 토한 뒤, 즉시 섬진강으로 달려갔다. 몇 리도 채 못 갔는데, 문득 어지럽게 널려진 시신들 속에서 신음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끊겼다 이어졌다 해서 소리가 나는 것인지 아닌지 분간하기도 어려웠다. 가서 보니 온 몸이 칼로 베이고 흐르는 피가 얼굴에 낭자하여 어떤 사람인지 알아 볼 수가 없었다. 그가 입고 있는 옷을 살펴보니 춘생이 입고 있던 것과 비슷했다. 그래서 최척은 큰 소리로 불러 말했다.
  "너는 춘생이 아니냐?"
  춘생이 눈을 들어보더니, 얼굴이 비참하게 일그러지며 기어드는 목소리로 희미하게 몇 마디를 중얼거렸다.
  "낭군이시여, 낭군이시여! 아아, 애통합니다! 주인 어른의 가족들은 모두 적병에게 끌려갔으며, 저는 어린 몽석을 등에 업고 달아났으나 빨리 달릴 수가 없어 적병의 칼에 맞게 되었습니다. 그 즉시 저는 땅에 넘어져 기절했다가 반나절만에 깨어났는데, 등에 업혔던 아이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춘생은 말을 마치더니 이내 죽고 말았다. 최척은 주먹으로 가슴을 치고, 땅에 쓰러져 기절했다가 한참 후에야 깨어났다. 이윽고 정신을 가다듬어 섬진강(蟾津江)으로 가서 보니, 강둑 위에 상처를 입고 쓰러진 수십 명의 노약자들이 서로 모여서 통곡을 하고 있었다. 최척이 다가가서 묻자, 노인들이 대답했다.
  "산 속에 숨어 있다가 왜적에게 여기까지 끌려 왔네. 왜적들은 여기에서 장정들만 가려 배에 실어 가고, 이처럼 병이 들거나 칼에 찔린 노약자들은 버려 두었네."
  최척은 이 이야기를 듣고 대성통곡(大聲痛哭)을 하였다. 혼자만 온전하게 살아남을 수 없다고 생각하여 자살을 하려고 했으나, 주위 사람들이 만류하여 죽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강의 상류로 터덜터덜 걸어올라 갔는데, 막상 돌아갈 곳도 없었다. 샛길을 찾아 겨우 고향에 이르러서 보니, 담벼락은 무너지거나 깨어져 있었다. 그 밖의 다른 것들도 모두 불타버려 쉴 곳은 물론, 곳곳에 시체가 언덕처럼 쌓여 발 디딜 틈도 없었다.
  마침내 최척이 금교(金橋) 옆에 주저앉아 쉬고 있는데, 문득 어떤 당(唐)나라 장수가 10여 명의 말 탄 병사를 거느리고 성안에서 나와 금교 아래에서 말을 씻기었다. 최척은 의병(義兵)으로 출전했을 때 당나라 장수들을 대접하기 위해 그들과 함께 오래도록 술을 마신 터라, 중국말을 조금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최척은 그 장수에게 자기 집안이 전몰(全沒)하게 된 사실을 이야기하고, 또 자기 한 몸마저 의탁할 곳이 없어 함께 중국으로 들어가 목숨이나 부지했으면 좋겠다고 호소하였다. 당나라 장수는 최척의 말을 듣고 슬퍼하였으며, 또 최척의 뜻을 불쌍하게 여겨 말했다.
  "나는 오총병에 속해 있는 천총인 여유문(余有文)이오. 집은 절강성(浙江省) 소흥부에 있으며, 재산은 비록 넉넉지 않으나 먹고살기에는 부족함이 없소. 인생은 서로의 마음을 알아주는 것이 소중하니, 가고 아니 가고는 그대의 뜻대로 하시오. 게다가 나는 이미 집안 일에 연연(戀戀)하지 않고 장차 멀리 유람할 계획을 갖고 있소. 그런데 어찌 반드시 홀로 한 가지 방책만 고수하여 소심하게 그대의 뜻을 받아들이지 못하겠소."
  마침내 최척은 말 한 필을 얻어 타고 당나라 진중으로 들어갔다. 최척은 용모가 준수하고 지략이 심원하였으며, 활쏘기와 말타기를 잘하고 한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여공(余公)은 최척을 매우 아껴 같은 막사에서 식사를 하고 잠도 같이 잤다. 얼마 뒤 총병(摠兵)이 병사들을 철수하여 중국으로 돌아감에, 최척은 전투(戰鬪)와 삼군의 장부(帳簿)를 담당하는 임무를 맡아 국경의 관문(關門)을 통과하여 소흥부(紹興府)에서 살았다.
  한편, 최척의 가족들은 포로가 되어 강까지 끌려 왔는데, 적병들은 최척의 부친과 장모가 늙고 병이 들어 달아나지 못하리라 생각하고 방비를 소홀히 하였다. 최척의 부친과 장모는 적들이 방심하는 순간을 틈타 몰래 갈대 숲 속으로 달아나 숨었다. 이윽고 왜적들이 물러가자, 두 사람은 갈대 숲에서 나와 이 고을 저 마을을 구걸하며 떠돌다가 마침내 연곡사로 굴러들게 되었다. 그런데 승방(僧房)에서 어린아이의 구슬픈 울음소리가 들려 왔다. 이에 최씨가 울면서 최숙에게 말했다.
  "이것이 어떤 아이의 소리입니까? 꼭 우리 아이의 울음소리 같습니다."
  최숙이 문을 열어서 보니 바로 몽석이었다. 마침내 최숙은 기이한 인연에 놀라며, 아이를 품에 안고 울음을 달래었다. 그리고 몽석을 안고 나오면서 스님에게 물었다.
  "이 아이가 어디서 이곳으로 왔습니까?"
  혜정(惠正)이라는 스님이 말했다.
  "수북하게 쌓여 있는 시체더미 속에서 이 아이가 응애응애 울면서 기어 나왔는데, 제가 그 모습이 하도 불쌍하여 이곳으로 데리고 와 아이의 부모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아이가 살아난 것은 곧 하늘이 내려주신 복입니다. 어찌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최숙은 손자 아이를 심씨와 번갈아 업어가면서 집으로 돌아와 흩어졌던 노복들을 거둬들이고, 집안 일을 돌보면서 함께 의지해 살았다.
  이때 옥영은 왜병인 돈우(頓于)에게 붙들렸는데, 돈우는 인자한 사람으로 살생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본래 부처님을 섬기면서 장사를 업으로 삼고 있었으나, 배를 잘 저었기 때문에 왜장(倭將)인 평행장(平行長)이 뱃사공의 우두머리로 삼아 데려왔던 것이다. 돈우는 옥영의 영특한 면모를 사랑하였다. 옥영이 붙들린 채 두려움에 떠는 것을 보고 좋은 옷을 입히고 맛있는 음식을 먹이면서 옥영의 마음을 달래었다. 그러나 옥영이 여자인 줄은 끝내 몰랐다. 옥영은 물에 빠져 죽으려고 두세 번 바다에 뛰어 들었으나, 사람들이 번번이 구출해서 결국 죽지 못하고 말았다.
  어느 날 저녁이었다. 옥영의 꿈에 장육금불이 나타나 분명하게 말했다.
  "삼가 죽지 않도록 해라. 후에 반드시 기쁜 일이 있을 것이다."
  옥영은 깨어나 그 꿈을 기억해 내고는 전혀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마침내 억지로라도 밥을 먹으며 죽지 않고 살아 남았다.
  돈우의 집은 낭고사(浪沽射)에 있었는데, 집에는 늙은 아내와 어린 딸만 있고 다른 사내는 없었다. 돈우는 옥영을 집안에서만 생활하고 다른 곳에는 일체 나가지 못하게 하였다. 이에 옥영은 돈우에게 거짓말로 일렀다.
  "저는 단지 어린 사내로 약질에다가 병이 많습니다. 예전에 본국에 있을 때에도 남자들의 일을 감당할 수가 없어 오로지 바느질과 밥 짓는 일만을 했습니다."
  돈우는 더욱 불쌍하게 생각하여 옥영에게 사우(沙于)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그는 배를 타고 장사를 다닐 때마다 옥영을 데리고 가서 부엌일을 맡겼다. 그래서 옥영은 배 안에 있으면서 민절의 사이를 왕래하였다.
  이때 최척은 소흥부에 살면서 여공과 의형제를 맺었다. 여공이 자신의 누이를 최척에게 시집보내려 하자, 최척이 완고하게 사양하며 말했다.
  "저는 온 집안이 왜적에게 함몰되어 늙으신 아버지와 허약한 아내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아직까지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죽을 때까지 상복(喪服)을 벗을 수 없을 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마음놓고 아내를 얻어서 편안한 생활을 꾀할 수 있겠습니까?"
  이에 여공은 더 이상 이 문제에 대해서 논의하지 않았다.
  그 해 겨울에 여공은 병으로 인해 죽고 말았다. 최척은 또다시 갈 곳이 없어 강호를 떠돌며 두루 명승지(名勝地)를 유람하였다. 용문(龍門)과 우혈을 살펴보고, 소상강(瀟湘江)과 동정호(洞廷湖)를 유람하였으며, 악양루(岳陽樓)와 고소대에도 올라갔다. 이렇듯 최척은 강산을 떠돌며 시를 읊조리고 구름과 물 사이를 배회하다가, 마침내 소심하게 사물에 얽매여 근심하지 않고 바람 따라 떠돌며 한 세상을 보내리라 마음먹게 되었다. 이러는 사이에 해상(海上)의 섬도사(蟾道士) 왕은(王隱)이라는 사람이 아미산 아래에 살고 있는데, 금련단을 달여 먹고 대낮에 하늘을 날 수 있는 재주를 가졌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최척은 장차 촉 땅으로 가 그에게 선술을 배우려고 하였다.
  때마침 주우(朱佑)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호(號)를 학천(鶴川)이라고 했으며, 집이 용금문(湧金門) 밖에 있었다. 그는 경전(經典)과 사서(史書)에 두루 통했으나 공명을 달갑게 여기지 아니하고 물건 매매를 생업으로 삼았으며,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고 의기(義氣)를 숭상하였다. 최척과는 예전부터 절친하게 지내는 사이였는데, 최척이 촉으로 간다는 소식을 듣고 술을 가지고 왔다. 주우는 술잔을 들고 최척의 자(字)를 부르며 말했다.
  "백승아! 백승아!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누군들 오래 살고 싶지 않겠는가? 그러나 고금천하(古今天下)를 오래도록 보아 왔지만 죽지 않은 사람이 어디에 있었는가? 남은 인생이 얼마나 된다고 음식을 물리치고 배고품을 참는 등 스스로를 괴롭히면서 산에 사는 귀신과 이웃이 되려고 하는가? 자네는 모름지기 나에게 와서 나와 함께 사는 것이 좋겠네. 일엽편주(一葉片舟)에 몸을 싣고 오로지 마음이 내키는 대로 다니며, 아침저녁으로 오(吳) 땅과 초(楚) 땅을 오가며 비단과 차를 팔고 다니세. 이렇게 강호(江湖)를 유랑하며 남은 인생을 즐기는 것이 바로 달인(達人)의 경지요,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지상(地上)의 신선이 하늘에서 노니는 것을 배웠다'고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최척은 주우의 말을 듣고 확연하게 깨달은 바가 있었다. 그래서 주우와 함께 가게 되었는데, 이때가 경자년 늦봄이었다. 최척과 주우는 배를 타고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차를 팔다가 마침내 안남에 이르게 되었다. 이때 일본인 상선(商船) 10여 척도 강 어구에 정박하여 10여 일을 함께 머물게 되었다.
  날짜는 어느덧 4월 보름이 되어 있었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고 물은 비단결처럼 빛났으며, 바람이 불지 않아 물결 또한 잔잔하였다. 이날 밤이 장차 깊어 가면서 밝은 달이 강에 비추고 옅은 안개가 물위에 어리었으며, 뱃사람들은 모두 깊은 잠에 빠지고 물새만이 간간이 울고 있었다. 이때 문득 일본인 배 안에서 염불(念佛)하는 소리가 은은히 들려 왔는데, 그 소리가 매우 구슬펐다. 최척은 홀로 선창에 기대어 있다가 이 소리를 듣고 자신의 신세가 처량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즉시 행장(行裝)에서 피리를 꺼내 몇 곡을 불어서 가슴속에 맺힌 회한을 풀었다. 때마침 바다와 하늘은 고요하고 구름과 안개가 걷히니, 애절한 가락과 그윽한 흐느낌이 피리 소리에 뒤섞이어 맑게 퍼져 나갔다. 이에 수많은 뱃사람들이 놀라 잠에서 깨어났으며, 그들은 처연하게 앉아 피리 소리에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격분해서 머리가 곧추 선 사람도 피리 소리에 분을 가라앉힐 정도였다.
  잠시 후에 일본인 배 안에서 조선말로 칠언절구(七言絶句)를 읊었다.

    王子吹簫月欲底 왕자진의 피리 소리에 달마저 떨어지려 하는데,
    碧天如海露凄凄 바다처럼 푸른 하늘엔 이슬만 서늘하구나.

  시를 읊는 소리는 처절하여 마치 원망하는 듯, 호소하는 듯 하였다. 시를 다 읊더니, 그 사람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최척은 그 시를 듣고 크게 놀라서 피리를 땅에 떨어뜨린 것도 깨닫지 못한 채, 마치 실성(失性)한 사람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 이를 보고 학천(鶴川)이 말했다.
  "어디 안 좋은 곳이라도 있는가?"
  최척은 대답을 하고 싶었으나 목이 메이고 눈물이 떨어져 말을 할 수 없었다. 시간이 조금 흐른 뒤에 최척은 기운을 차려 말했다.
  "조금 전에 저 배 안에서 들려왔던 시구(詩句)는 바로 내 아내가 손수 지은 것이라네. 다른 사람은 평생 저 시를 들어도 절대 알아내지 못할 것일세. 게다가 시를 읊는 소리마저 내 아내의 목소리와 너무 비슷해 절로 마음이 슬퍼진 것이라네. 어떻게 내 아내가 여기까지 와서 저 배 안에 있을 수 있겠는가?"
  이어서 온 가족이 포로로 잡혀간 일을 말하자, 배 안에 있던 사람들 가운데 비탄에 젖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 가운데는 두홍(杜洪)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젊고 용맹한 장정이었다. 그는 최척의 말을 듣더니, 얼굴에 의기(義氣)를 띠고 주먹으로 노를 치면서 분연히 말했다.
  "내가 가서 알아보고 오겠소."
  학천이 저지하며 말했다.
  "깊은 밤에 시끄럽게 굴면 많은 사람들이 동요할까 두렵네. 내일 아침에 조용히 물어 보아도 늦지 않을 것일세."
  주위 사람들이 모두 말했다.
  "그럽시다."
  최척은 앉은 채로 아침이 되기를 기다렸다. 동방이 밝아오자, 즉시 강둑을 내려가 일본인 배에 이르러 조선말로 물었다.
  "어젯밤에 시조를 읊었던 사람은 조선 사람 아닙니까? 나도 조선 사람이기 때문에 한 번 만나 보았으면 합니다. 멀리 다른 나라를 떠도는 사람이 비슷하게 생긴 고국 사람을 만나는 것이 어찌 기쁘기만 한 일이겠습니까?"
  옥영도 어젯밤에 들려왔던 피리 소리가 조선의 곡조(曲調)인데다, 평소에 익히 들었던 것과 너무나 흡사하였다. 그래서 남편 생각에 감회가 일어 저절로 시를 읊게 되었던 것이다. 옥영은 자기를 찾는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는 황망하게 뛰어나와 최척을 보았다.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바라보고는 놀라서 소리를 지르며 끌어안고 백사장을 뒹굴었다. 목이 메이고 기가 막혀 마음을 안정할 수 가 없었으며, 말도 할 수 없었다. 눈에서는 눈물이 다하자 피가 흘러내려 서로를 볼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두 나라의 뱃사람들이 저자 거리처럼 모여들어 구경하였는데, 처음에는 다만 친척이나 잘 아는 친구인 줄로만 알았다. 뒤에 그들이 부부 사이라는 것을 알고 사람마다 서로 돌아보며 소리쳐 말했다.
  "이상하고 기이한 일이로다! 이것은 하늘의 뜻이요, 사람이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로다. 이런 일은 옛날에도 들어보지 못하였다."
  최척은 옥영에게 그간의 소식을 물으며 말했다.
  "산 속에서 붙들리어 강가로 끌려갔다는데, 그때 아버님과 장모님은 어떻게 되었소?"
  옥영이 말했다.
  "날이 어두워진 뒤에 배에 오른 데다 정신이 없어 서로 잃어버리게 되었으니, 제가 두 분의 안위를 어떻게 알겠습니까?"
  두 사람이 손을 붙들고 통곡하자, 옆에서 지켜보던 사람들도 슬퍼하며 눈물을 닦지 않는 이가 없었다.
  학천은 돈우를 만나 백금(白金) 세 덩이를 주고 옥영을 사서 데려 오려고 하였다. 그러자 돈우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내가 이 사람을 얻은 지 이제 4년 되었는데, 그의 단정하고 고운 마음씨를 사랑하여 친자식처럼 생각해 왔습니다. 그래서 침식을 함께 하는 등 잠시도 떨어진 적이 없었으나, 지금까지 그가 아낙네인 것을 몰랐습니다. 오늘 이런 일을 직접 겪고 보니, 이는 천지신명(天地神明)도 오히려 감동할 일입니다. 내가 비록 어리석고 무디기는 하지만 진실로 목석(木石)은 아닙니다. 그런데 차마 어떻게 그를 팔아서 먹고 살 수 있겠습니까?"
  돈우는 즉시 주머니 속에서 은자(銀子) 10냥을 꺼내어 전별(餞別金)으로 주면서 말했다.
  "4년을 함께 살다가 하루아침에 이별하게 되니, 슬픈 마음에 가슴이 저리기만 하오. 온갖 고생 끝에 살아 남아 다시 배우자를 만나게 된 것은 실로 기이한 일이며, 이 세상에는 없었던 일일 것이오. 내가 그대를 막는다면 하늘이 반드시 나를 미워할 것이오. 사우(沙于)여! 사우여! 잘 가시게! 잘 가시게!"
  옥영이 손을 들어 감사를 드리며 말했다.
  "일찍이 주인 영감님께서 보호해주신 덕분에 지금까지 죽지 않고 살아오다가 뜻밖에 낭군을 만나게 되었으니, 제가 받은 은혜가 이미 끝없이 많기만 합니다. 게다가 이렇듯이 기뻐하며 전별금까지 주시니 진실로 그 은혜를 잊지 않겠으며, 백 번 절하여 감사드립니다."
  최척이 옥영과 함께 본 배로 돌아오자 이웃 배에서 이들을 보러 오는 사람들이 연일 끊이지 않았으며, 어떤 사람들은 금은(金銀)과 비단을 주기까지 했다.

(중략 - 최척은 아내와 더불어 아들 몽선을 낳아 길러, '홍도'라는 여인을 며느리로 맞이한다. 그러던 중 최척은 다시 전쟁에 차출되어 전쟁터로 나간다. 거기서 우연히 맏아들 몽석을 만난 최척은 우여곡절 끝에, 아들과 함께 조선으로 돌아오는 데 성공한다.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조선에 나와있던 홍도의 부친과 만나 동행하게 된다. - 그 우여곡절.. 한편, 아들 내외와 함께 중국에 남아있던 옥영은 배를 타고 조선으로 가기로 결심한다.)

  옥영이 말했다.
  "수로(水路)는 험난하긴 하지만 내가 이미 경험을 갖추고 있다. 옛날 일본에 있을 때 배를 집으로 삼아 봄에는 민광에서 장사를 하고, 가을에는 유구에서 물건을 팔았다. 거대하고 무서운 파도의 출몰(出沒)도 별이나 조수(潮水)의 흐름을 살펴서 점칠 수 있을 정도로 경험이 매우 풍부하다. 험난한 파도도 내가 맡을 것이요, 배의 안전도 내가 알아서 하겠다. 설사 불행한 일이 생기더라도 어찌 벗어날 방도가 없겠느냐?"
  옥영은 즉시 조선과 일본 두 나라의 옷을 짓고, 매일 아들과 며느리에게 두 나라 말을 가르쳐 익히게 했다. 그리고 날마다 행사와 관련하여 몽선에게 주의를 주며 말했다.
  "항해가 잘되고 잘못되고는 오로지 돛대와 노에 달려 있으니, 돛대는 촘촘히 기워야 하고 노는 견고해야 한다. 또 없어서는 안될 것이 지남석이다. 항해할 날짜는 내가 정할 것이니 나의 뜻을 어기지 않도록 해라."
  몽선이 근심에 어린 채 물러나 사사로이 홍도를 꾸짖으며 말했다.
  "어머님께서 목숨을 돌보지 않으시고 만 번 죽을 계획을 세우시어, 험난한 바다를 건너 조선으로 돌아가려고 하시네. 그런데 당신은 그 일을 찬성할 뿐 아니라 어머님과 번갈아 가며 나를 위협하기까지 하니, 어찌 차마 못할 일을 이렇듯 심하게 하오? 우리 아버님께서는 이미 돌아가셨는데 어머니마저 어느 곳에다 묻으려 하는 거요?"
  홍도가 말했다.
  "어머님께서는 지성으로 이 큰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진실로 말로써는 막을 수가 없습니다. 혹 돌이키기 어려운 후회를 할까 염려스럽기도 하지만, 지금은 어머님 계획을 순순히 따르는 것보다 좋은 것이 없을 듯합니다. 제 개인적인 마음이야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겠습니까? 태어난 지 겨우 몇 개월만에 아버지께서는 다른 나라에서 전사하시어, 이역 땅에 뼈를 드러내 놓은 채 잡초에 뒤엉켜 있습니다. 어머니께서도 제가 몇 살밖에 안 되었을 때 눈을 들어 웃으시더니 등을 보이시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세상에 살 마음이 없었습니다. 근래 길거리에서 들으니, 싸움에서 패배한 군졸들 가운데 조선으로 달아나서 떠도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자식된 마음으로 요행(僥倖)을 바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만약 낭군의 힘에 의지하여 조선에 당도해서 한 번이라도 전쟁터를 바라보고 아버님의 혼백을 모아 술잔을 올린다면, 외롭게 떠도는 넋이나마 위로할 수 있을 듯 합니다. 그러면 저의 끝없는 원통함이 옅어져 아침에 가서 저녁에 죽더라도 실로 달게 여기겠습니다."
  홍도는 말을 마치자 흐느껴 울었다. 몽석은 이윽고 어머니와 아내가 똑같이 일을 결행(決行)하기로 확실하게 마음을 정해서 이를 꺾거나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떠날 준비를 단단히 하고, 경신년 2월 초하루에 닻을 올려 출항키로 했다. 출발할 날짜가 결정되자, 옥영이 아들에게 말했다.
  "조선은 동북쪽에 있기 때문에 반드시 남서풍을 기다려야만 한다. 너는 모름지기 앉아서 노를 단단히 잡고 오직 나의 지시만을 따르도록 해라."
  드디어 깃대에 깃발을 달고 자석(磁石)을 뱃전에다 설치하였다. 배 안을 점검해 보니 모든 것이 다 잘 갖추어져 있었다. 돌고래가 물을 뿜고 바다 상어가 파도를 일으켰으며, 바람이 공중에서 일어나더니 깃발이 북쪽을 향해 펄럭였다. 세 사람이 힘을 다해 돛을 올리자, 배가 밤낮없이 파도를 가로지르며 질주하였다. 벽력같은 화살이 풍랑 속으로 들어가고 번개가 날 듯이 순식간에 내주에 올랐다. 얼마 뒤 푸른 망망대해(茫茫大海)에 떠 있는 섬들이 나타나더니 눈을 놀리는 순간 사라져 갔다.
  하루는 중국인 배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들이 물었다.
  "어느 지방의 배이며, 어디로 가느냐?"
  옥영이 응답하여 말했다.
  "나는 항주(杭州) 사람인데 차를 사기 위해 산동으로 가는 중입니다."
  또 며칠 뒤에는 일본인 배를 만나게 되었다. 옥영은 즉시 아들, 며느리와 함께 일본인 옷으로 갈아입고 기다렸다. 일본인 배가 다가와서 물었다.
  "너희들은 어느 지방 사람이며, 어디에서 오는 중이냐?"
  옥영이 일본어로 대답하였다.
  "고기를 잡으러 바다로 들어왔다가 풍랑을 만나 표류하게 되었습니다. 배와 노가 깨지고 부러져 항주에서 배를 사서 돌아가는 중입니다."
  일본 사람이 말했다.
  "고생을 많이 했군요! 고생을 많이 했군요! 여기서 일본까지는 얼마 안되니 남쪽으로 가십시오."
  이날 남풍이 심하게 불었다. 해가 이윽고 서쪽 바다 속으로 들어가자, 흰 이무기는 풍랑을 일으키고 푸른 파도는 하늘이 놀라 정도로 치솟아 올랐다. 구름과 안개가 사방에 가득 끼어 지척도 분간하기 어려웠으며, 노는 부러지고 돛은 찢어져 어디로 가야 할 지 알 수가 없었다. 몽선 부부는 깜짝 놀라서 뱃바닥에 엎드리더니 이내 뱃멀미를 하였다. 옥영은 의연하게 홀로 앉아 하늘을 우러르며 말없이 기도하였다. 밤이 되면서 풍랑이 잦아들더니 배가 흘러서 조그만 섬에 이르렀다.
  배를 수리하기 위해 며칠 머물러 있는데, 홀연히 바다 가운데서 배 한 척이 점차 다가왔다. 옥영은 몽선에게 배 안에 있는 장비(裝備)를 주머니에 담아서 바위 동굴에 숨기게 하였다. 잠시 후에 뱃사람들이 시끄럽게 떠들면서 내려왔다. 말소리는 조선말이나 일본말은 아니었으며, 대략 중국말과 흡사했다. 그들은 창이나 칼 등 무기는 갖고 있지 않았으나, 흰 몽둥이로 때리고 위협하면서 화물(貨物)을 내놓으라고 요구하였다. 이에 옥영이 중국말로 대답했다.
  "나는 중국 사람으로 고기를 잡기 위해 바다에 나왔다가 표류하여 이곳에 정박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본래부터 화물은 있지도 않습니다."
  옥영이 눈물을 흘리면서 살아서 돌아가게 해달라고 애걸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죽이지는 않고 옥영이 타고 왔던 배를 빼앗아 자기들 배의 후미에 묶고 가버렸다. 그들이 떠난 뒤 옥영이 몽선 부부에게 말했다.
  "이들은 필시 해적들일 것이다. 내가 들으니 해적들의 섬이 조선과 중국의 사이에 있는데, 수시로 출몰하여 재물을 약탈하되 사람은 죽이지 않는다고 하더구나. 이들이 그 놈들임이 분명하다. 내가 아들의 말을 듣지 않고 억지로 떠났다가 하늘이 돕지 않아 이런 낭패를 당하게 되었구나. 이미 배와 노를 잃어버렸으니 다시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 어두운 하늘과 드넓은 바다를 날아서 건너갈 수도 없고 죽엽(竹葉)이나 마른 떼 등 몸을 실어 띄울 것도 없으니, 오로지 죽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구나. 나야 이미 죽은 목숨과 다름이 없기 때문에 상관이 없지만, 너희 부부가 어질지 못한 이 어미 때문에 죽게 된 것이 가련키만 하구나."
  말을 마친 옥영이 아들 내외와 함께 슬프게 우니, 그 소리가 매우 처절하였다. 바닷가에 맺힌 한이 파도를 타고 겹겹이 밀려옴에 바다는 오므라들어 펴지지 않는 듯 하였으며, 산귀신(山鬼神)은 얼굴을 찡그리고 신음하였다. 옥영이 해안으로 올라가 바다에 투신하려고 하자, 아들과 며느리가 함께 만류하여 물 속에 빠질 수가 없었다. 옥영은 몽선을 돌아보며 말했다.
  "너는 내가 죽는 것을 말리지 말아라. 더 이상 무엇을 기다릴 수 있겠느냐? 주머니에 남은 식량은 겨우 3일 먹을 것밖에 안 된다. 앉아서 주머니가 비기를 기다리며 살아남은들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
  몽선이 말했다.
  "식량이 다 떨어진 뒤에 죽더라도 늦지 않습니다. 그 사이에 만약 살 길이 생긴다면 장차 얼마나 후회할 일이겠습니까?"
  몽선은 마침내 어머니를 부축해 언덕에서 내려와 겨우 바위 동굴에 엎드려 쉬게 되었다. 한참 후 잠에서 깨어난 옥영이 아들과 며느리에게 말했다.
  "기운이 빠지고 몸이 피곤하여 문득 정신없이 잠이 들었는데, 꿈에 장육금불께서 또 좋은 징조를 아뢰니 참 이상하구나."
  세 사람은 서로 마주 보고 기뻐하면서 말없이 기도를 올렸다. 며칠 후 멀리 바다 가운데서 돛단배가 둥둥 떠오는 것이 보였다. 이에 몽선이 놀라서 말했다.
  "예전에 보지 못했던 배가 바다 가운데서 다가오고 있는데, 매우 걱정이 됩니다."
  옥영이 머리들 들고 보더니 기뻐하며 말했다.
  "너는 겁내지 말아라. 우리는 이제 살았다. 저것은 조선인의 배다. 기다려보면 당연히 알게 될 것이다."
  옥영 등은 버드나무를 불태워 연기를 내고 언덕으로 올라가 옷을 흔들었다. 그리고 모두 조선의 옷으로 갈아입은 후 바위 위에 늘어서 있었다. 조선 사람들이 배를 멈추고 물었다.
  "당신들은 어떤 사람들인데 이런 외딴 섬에 와 있소?"
  옥영이 대답했다.
  "우리는 경성(京城)의 양반인데, 나주(羅州)로 내려가다가 갑자기 풍파를 만나 배는 뒤집히고 사람들은 다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오직 우리 세 사람만이 돛대 자리를 끌어안고 표류하다가 이곳에 이르렀습니다."
  뱃사람들이 불쌍하게 여겨 세 사람을 태우고 귀항(歸航)하면서 말했다.
  "이 배는 통영(統營)으로 음식물을 싣고 가는 배입니다. 관가(官家)의 일정이 정해져 있어 한양(漢陽)으로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순천에 이르자 배를 다리에 정박시켜 놓고 세 사람을 내려 주었다. 이때가 경신년(庚申年) 4월이었다. 옥영 일행은 5, 6일을 걸어서 남원에 도착하였다. 옥영은 마음속으로 집이 온통 난리 중에 함몰되었을 것이기에 단지 옛 집터만을 찾아가려고 생각하였다. 감회에 젖어 두루 돌아보며 먼저 만복사를 향해 갔다. 금교 옆에 이르러 앉아서 바라보니, 성곽(城郭)이 완연하였으며 시골의 집들도 예전과 다름이 없었다. 옥영은 몽선을 돌아보고 손가락으로 한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가 너의 아버지 집이었는데, 지금은 누구의 집이 되었는지 모르겠구나. 모두 가서 하룻밤 머물러 자면서 옛날 일이나 돌이켜 보자꾸나."
  옥영 일행이 곧 일어나 그 집 문 앞으로 나아가 보니, 최척과 그의 아버지가 수양버들 아래 앉아 있었다. 시아버지와 며느리, 남편과 아내, 아버지와 아들, 형제가 놀라서 서로 부등켜안고 통곡을 하였다. 진위경도 와서 자기 딸과 상봉을 하였으며, 심씨는 허둥지둥 달려나와 딸 옥영을 끌어안고 통곡하다가 기절하고 말았다. 모두들 꿈이요, 세상에 진짜로 벌어진 일이 아닌 듯이 슬픔과 기쁨을 억누르지 못하였다. 이 광경을 보기 위해 사방의 이웃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는데, 그들은 처음에는 기괴한 놀이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지금까지 겪었던 옥영과 홍도의 이야기를 자세히 듣고는 모두들 놀라며 축하하고, 서로들 말을 전해 이 소문이 사방으로 퍼졌다.
  옥영이 최척에게 말했다.
  "우리가 오늘 이처럼 만난 것은 실로 장육금불께서 은연중에 은혜를 베푸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 은혜에 보답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에 최척과 옥영은 두 아들과 두 며느리를 이끌고 성대하게 제물을 갖추어 만복사로 가서 성의를 다해 재(齋)를 올렸다.
  이후로 최척과 옥영은 위로는 아버님과 장모님을 잘 받들고, 아래로는 자식과 며느리들을 잘 보살피며 서문(西門) 밖 옛 집에서 살았다. 진유경도 홍도에게 의탁하여 최척의 집에 함께 살면서 동고동락(同苦同樂)하였다.
  남원부윤이 이 이야기를 상소(上疏)로 올리자, 조정(朝廷)에서는 최척에게 특별히 정헌대부를 가자(加資)하고, 그의 아내 옥영을 정렬부인에 봉하였다. 2년 후인 신유년(辛酉年)에 몽석과 몽선 두 형제가 모두 무과(武科)에 급제하였다. 후에 몽석은 관직(官職)이 호남병마절도사에 이르렀으며, 몽선은 해남현감이 되었다. 이때까지 최척 부부는 모두 살아서 아들들의 영광스러운 봉양을 많이 받았으니, 참으로 희한한 일이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