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오신화(3) - 취유부벽정기

금오신화(3) - 취유부벽정기

 
  정축년에 개성 사는 부잣집 아들 홍생은 얼굴이 아름답고 글을 잘하였다. 팔월 한가윗날을 맞아 친구들과 함께 포백과 면사를 평양에 내다 팔려고 배에 싣고 강가에 댔다. 성중에서 구경나온 기생들은 홍생을 보고 아양을 떨었다. 그 때 성중에서는 이생이란 친구가 있어 홍생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는데 술이 취하여 배를 되돌리게 되매 홍생은 흥취를 진정할 수 없어 조그마한 배를 갈아타고 달빛을 그득 실어 노를 저으며 대동강물을 따라 거슬러올라가 부벽정에 당도하였다.
  그는 배를 갈대밭에 매두고 사닥다리를 밟고 올라갔다. 그리고 난간에 의지하여 옛 도읍을 돌아보니 내 낀 외로운 성에 물결만 찰싹거릴 뿐이라 고국의 흥망을 탄식하여 여러 수의 시를 잇달아 읊었다.
시를 다 읊고 나자 그는 춤을 추기 시작하였다.얼마 동안을 이렇게 춤을 추며 노래하고 노래하며 춤추고 탄식하다가 돌아가려 할 때였다. 그 때 문득 가벼운 발소리가 나며 한 곱고 아름다운 여인이 나타났던 것이다.
  여인을 모신 아이가 좌우로 따르는데 한 아이는 옥으로 만든 파리채를, 한 아이는 비단 부채를 가지고 있었다. 아가씨는 남쪽 난간에 의지하여 흰 달을 쳐다보며 시를 읊는데, 그 때 시녀가 비단 방석을 펴 드리자 여인은 명랑한 음성으로 말하는 것이었다.
  "예서 방금 시 읊는 소리가 났는데, 어디로 가셨나? 이 아름다운 밤에 한잔 마시고 그윽한 정회를 펴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홍생은 그 말을 들으니 한편 두려운 생각도 있고 기쁘기도 하여 어쩔까 주저하다가 '에헴' 하고 기침소리를 냈다. 여인은 시녀를 시켜 말을 전하였다.
  "아가씨의 명을 받들어 모시고자 합니다,"
  홍생이 시녀를 따라가니 아가씨는 말하였다.
  "지금 읊는 시는 무슨 시입니까? 한 번 읊어 주실 수 있겠어요?"
  홍생이 일일이 외어 읊으니 아가씨는 반기며 시녀를 시켜 술을 올렸다. 그러나 음식은 너무 딱딱해서 먹을 수가 없었고 술도 써서 마실 수가 없었다. 인간 세계의 그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홍생이 당황하는 것을 보고 여인은 빙긋이 웃는다.
  "이 세상 사람이 어찌 선인의 술과 용의 고기포를 알겠느냐? 얘야, 빨리 신호사에 가서 절밥을 좀 얻어 가지고 오너라."
  시녀는 명을 받들고 가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절밥을 가지고 돌아왔다. 다음은 역시 주인의 명으로 주암에 가서 잉어적을 가지고 왔다. 홍생이 그것을 먹고 있는 사이에 여인은 홍생의 시에 화답시를 써서 시녀를 시켜 홍생에게 주었다.
  사랑을 구하는 내용이었다.
  홍생은 그시를 읽고 나서 여인에게 물었다.
  "성명과 족보를 알려 주실 수 없겠습니까?"
  "아, 이 몸은 저 옛날 은왕의 후예요 기자의 딸입니다. 우리 선조가 이 곳에 책봉되어 훌륭한 법을 세웠으므로 문화의 빛이 천 여년 뻗쳤으나 하루 아침에 멸망하기 시작하여 재앙과 환난이 겹치니 아버지는 필부의 손에 죽었습니다. 위만이 그 틈을 타서 임금의 자리를 도둑질하자 저는 절개를 잃지 않으려고 애썼는데 그 때 한 선인이 나타나 저를 어루만지며 '내 몸이 이 나라의 시조로서 부귀를 누린 후에 바닷섬에 가서 선인이 된 지 이미 수천 년이다. 너는 곧 나를 따라 상계에 올라가 즐겁게 노는게 어떠냐?' 하기에 곧 그것을 허락했습니다.
  그러자 그 분은 저를 데리고 자신이 살고 있는 곳에 이르러 별당을 지어 저를 주고 또 불사약을 주었습니다. 이 약을 먹은 후 기운이 샘솟아 공중에 높이 떠서 세계의 명승지를 유람하다가 달나라에 이르러 항아를 수정궁으로 방문하여 시녀로서 그를 모시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오늘 밤 하계를 내려다보고는 고국 생각이 나서 내려와 조상의 무덤에 성묘하고 부벽정에 올라 시름을 보내고 있던 중 그대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홍생은 두 번 절하고 머리를 조아려 인사한 다음 한 수의 시를 청하였다. 여인이 허락하고 붓을 들어 한 번 쓰면 마치구름과 내가 한데 어울리는듯 막힘이 없었다.
  내용은 남녀의 사랑과 자신의 외로운 정회를 담은 것이었다.
  여인은 쓰기를 마치자 붓을 던지고 공중에 높이 솟아 간 곳이 없고 다만 그의 시녀를 시켜 말을 전하는 것이었다.
  "옥황상제의 명령이 지엄하시어 저는 노새를 타고 돌아가니 다만 그대와 더불어 청담을 더 나누지 못함이 한이 될 뿐입니다."
  얼마 되지 않아 갑자기 돌개바람이 일더니 홍생의 앉은 자리를 걷어치우며 여인의 시를 날려 버려 간 곳이 없게 하였다. 이것은 쳔계가 그들의 일을 인간 세계에 선전하기 싫어하기 때문에 일어나 일이다. 홍생이 얼빠진 듯 우두커니 서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꿈도 생시도 아닌 이상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난간에 의지하여 여인이 남기고 간 말을 더듬어 소생시켜 보았다. 그리고 기이한 인연이라 아니 할 수 없으나 다 하지 못한 회포를 시로 읊었다.

      하염없는 허망한 꿈
      어느 해 어느 날에
      가신 임 다시 볼까
      대동강 푸른 물결
      무정타 말 말아라
      임 여읜 곳으로만
      슬피 울어예는구나

  읊고 나니 절간의 종이 울고 여러 마을의 닭들이 울었다. 달은 서녘 하늘에 기울고 샛별만 반짝거리는데 뜰 아래 쥐와 땅 밑에서 벌레 소리가 들려왔다. 홍생은 급히 배를 저어 돌아왔다.
  그 후 홍생은 그 아가씨를 생각하다가 상사병에 걸려 병상에 누웠다.
  그런 어느 날이었다. 꿈 속에 소복한 여인이 나타나서 홍생을 보고 말하는 것이었다.
  "우리 아씨께서 상황께 그대의 재주를 아뢰었던바 상황께서 견우성의 부하로 종사의 벼슬을 제수하려 하시니 빨리 가심이 어떻겠습니까?"
  홍생이 놀라 잠에서 깨어 일어나자 목욕재계하고 향을 피우고 집안을 깨끗이 한 다음 뜰에 자리를 깔고 잠깐 누웠다가 세상을 떠나니 곧 구월 보름날이었다. 죽은 지 며칠이 지나도 얼굴빛이 산 사람과 조금도 다름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게 되었다.
  '신선을 만나 시체가 선화해 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