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오신화(4) - 남염부주기

금오신화(4) - 남염부주기

 
  경주에 사는 박생이란 사람은 일찍이 불교, 무당, 귀신 등 모든 것에 대하여 의심을 품었다. 어느 날 절간의 스님과 불교에 대한 질의를 펴게 되었는데 스님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천당과 지옥이란 것에 대하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시오?"
  "그야 천지는 한 음양일 것인데 어찌 천지 밖에 그런 세계가 있겠소?"
  그러자 스님도 이에 대해서는 더 말하지 못하고 이번에는 화제를 다음으로 돌렸다.
  "명확히 말하기는 어렵소이다만 악인 악과 선인 선과의 화복이야 어찌하리오?"
  그러나 박생은 그 말을 믿지 않고 일리론이라는 책을 지어 스스로의 지표를 삼았다. 그리하여 불교의 이단적인 것에 빠지지 않으려고 하였다. 그는 한 마디로 유가의 신봉자였던 것이다.
  박생이 책을 저술한 수의 그 어느 날 밤이었다. 그는 책을 읽다가 잠깐 졸았다.문득 한 나라에 이르니 그것은 창망한 바다 가운데의 한 섬이었다.
  구리쇠가 아니면 쇠로 이루어진 섬인데 대낮에는 불길이 하늘을 찌를 지경이어서 대지가 다 녹아 없어지는 듯하고 밤이면 처참한 바람이 불어와서 사람의 살과 뼈를 태우는 듯하였다. 또한 쇠로 된 벼랑이 성벽과 같이 해변에 이어졌고 거기엔 다만 한 개의 철문이 있어 철문은 큰 자물쇠로 채워져 있었다. 문을 지키는 자는 꼴이 영악하기 짝이 없고 창과 철퇴로 외적을 방어하고 있는데 그 안에 있는 백성들은 낮에는 더워 죽을 지경이며 밤이면 얼어 죽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별로 고통을 느끼는 것 같지 않았다.
  "그대는 어떤 사람이오?"
  수문장의 질문에 박생은 떨면서 대답하고 엎드려 절을 하면서 빌었다.
  "아무 나라 아무 곳에 사는 유생이올시다. 당신께서는 용서해 주십시오."
  "유생이란 본래 위엄 앞에서도 굴하지 않는 것인데 그대는 어째서 이같이 굽히오? 우리 국왕께서는 유생을 만나 말을 동방에전하려 하던 참이었소. 잠깐 기다리시오."
  수문장이 안을 들어갔다 나오는 뒤를 따라 흑의와 백의를 입은 두 동자가 손에 두 권의 책을 가지고 왔는데 한 책은 흰 종이에 푸른 글자를 쓴 것이었고 한 책은 흰 종이에 붉은 글자를 쓴 것이었다. 동자가 그 책을 박생의 좌우에 펴놓고 보이는데 그의 성명은 붉은 글자로 적혀 있었다.
  "현재 아무 나라의 박아무개는 전생의 죄가 없으니 이 나라의 백성되기에 마땅치 않다."
  박생은 글을 읽고 동자에게 물었다.
  "내게 이 책을 보이는 것은 어떤 이유요?"
  "검은 책은 악질의 명부이며 흰 책은 선인의 명부요. 선인은 국왕께서 예법으로 맞고 악질은 노예로서 대우합니다."
  박생은 왕을 배알하게 되었다. 왕은 박생의 소매를 잡아 대궐에 오르게 하고 편전에 따로 앉을 자리를 마련해 주는 것이었다.
  "선비는 여기가 어딘지 모르실 거요.이 곳은 속세에서 말하는 염부주요. 염부는 불꽃이 항상 공중에 떠 있다는 뜻이오. 내가 이 곳의 왕이 된 지 일만 년이나 되었고 오래 살다 보니 무슨 일이든 신통 변화를 부릴 수 있게 되었소. 창힐이 글자를 만드니 내 백성을 보내어 울게 했고 구담이 부처가 되매 내 부하를 보내어 보호해 주었소. 삼황과 오제와 주공과 공자에 이르러서는 그들이 스스로의 도를 지키니 내 어찌할 수 없어 아무런 관계도 없었던 거요."
  박생은 물었다.
  "줏공과 구담은 어떤 인물입니까?"
  "주공은 종화문물의 성인이요, 구담생은 서역의 성인이오. 두 분다 정도를 닦고 세운 사람이오."
  박생은 또 물었다.
  "귀신이란 어떤 것입니까?"
  "귀란 음의 영이요. 신이란 양의 영으로 조화의 자취이니 이기의 *양능인데, 살았을 때는 인물이라 하며 죽으면 귀신이라 하나 그 이치는 다른 것이 없소."
  "세상에서는 귀신에게 제사하는 예가 있는데 제상의 귀신과 조화의 귀신과는 어떻게 다른 것입니까?"
  "다를 것이 없소."
  "제가 일찍이 들으니 스님들에 의하면 하늘 위에 천당이 있고 지하에는 지옥이 있다는데 사실입니까?"
  "그게 무슨 말이오? 금시 초문이오."
  "그러면 윤회설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아야 하겠습니까?"
  "정신이 흩어지지 않았을 때 마치 윤회의 길이 있을 듯하나 오래 되면 소멸하고 마는 거요."
  "왕께서는 어떤 연고로 이런 세상에 살고 계시며 임금이 되셨습니까?"
  "내가 세상에 있을 때 왕께 충성을 다하고 좋은 일을 했기 때문이오. 여기 살면서 나를 우러러 좇는 자는 다 전세에 흉악한 짓을 한 자들이오. 그들은 내 훌륭한 본을 받게 된 거요. 그러나 내 이제 시운이 다 하여 이 자리를 떠나야 할 판이오. 선생도 명수가 끝날 것 같으니 이 나라의 백성을 맡아 주실 분은 선생이 아니고 누구겠소?"
  문답이 끝난 후 염마는 박생에게 왕위를 전수코자 손수 선위문을 지어 박생에게 내주고는 박생을 고국으로 잠깐 돌려보낼 때 이렇게 당부하는 것이었다.
  "멀지 않아 이 곳에 돌아올 것이니 나와 함께 문답한 전말을 인간에게 퍼뜨려 황당한 전설을 남게 하지 마시오."
  "감히 명령을 어길 수 있겠습니까?"
  박생이 잠을 깨니 그것은 한낮 허무한 꿈이었다.
  몇 달 후에 병이 들어 누웠으나 박생은 의원과 무당을 물리치고 고요히 죽어갔다.
  그가 가던 날 저녁 신인이 이웃 사람들 꿈에 나타나서 말하였다.
  '그대 이웃의 아무개가 장차 염라왕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