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오신화- 이생규장전(李生窺牆傳)

금오신화- 이생규장전(李生窺牆傳)


  개성(開城) 낙타교(駱駝橋) 밑에 이생(李生)이라는, 열 여덟 살 된 총각이 살고 있었다.
  그는 얼굴이 말끔하고 재주가 비범하여 학문에 뜻이 있어, 일찍이 국학(國學)에 다닐 때 길가에서도 부지런히 글을 외우곤 하였다.
  마침 선죽리(善竹里)에 최랑(崔娘)이라는 귀족집 처녀가 살고 있었는데 나이는 16세쯤 되었고, 태도가 아름답고 수놓는데 익숙하며 시문에 능통하였다. 동네 사람들은 시를 지어 두 사람을 찬미하였다.

      風流李氏子 窈窕崔家娘 풍류재자 이수재야 반달같은 최처녀야
      才色若可餐 可以療飢腸 너희 재주 너희 얼굴 한번 보면 배부르다

  이생이 책을 옆에 끼고 학교에 갈 때에는 반드시 최랑의 집 북쪽 담 밖으로 지나가게 되었다. 하늘하늘한 수양버들이 그 담을 둘러싸고 있었다.
  어느 날 이생이 그 나무 그늘 밑에서 쉬다가 우연히 담 안을 엿보았는데, 이름 있는 꽃들이 한봄을 맞아 만발하였고 벌과 새들이 고운 노래를 부르는 꽃나무 사이로 자그마한 다락이 하나 어렴풋이 보였다.
  구슬 발은 반 정도 가렸고 비단 장은 낮게 드리웠는데 어여쁜 아가씨가 수를 놓다가 포근함을 이기지 못하여 바늘을 잠깐 멈추고는, 턱을 괴고 앉아 시 두 수를 읊었다.

      獨倚紗窓刺繡遲 사창(紗窓)에 기대 앉아 수놓기도 느리구나
      百花叢裏轉黃  활짝 핀 꽃떨기에 꾀꼬리는 지저귀고.
      無端暗結東風怨 살랑이는 봄바람을 부질없이 원망하며
      不語停針有所思 가만히 바늘 멈추고 생각에 잠겨 있네.
      路上誰家白面郞 저기 가는 저 총각은 누구 집 도련님고
      靑衿大帶映垂楊 푸른 깃 넓은 띠가 버들 새로 비쳐오네.
      何方可化堂中燕 이 몸이 화신하여 대청 안의 제비 되면
      低掠珠簾斜度牆 주렴을 사뿐 걷어 담장 위를 넘어가리.

  이생은 그녀가 읊은 시를 듣고 나니 마음이 싱숭생숭하여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집의 담은 높고 안채가 깊은 곳에 있어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어느 날 이생은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꾀를 내어, 흰 종이 한 폭에다 시 세 수를 적어서 기와쪽에 매달아 담 안으로 던졌다.

      巫山六六霧重回 무산(巫山) 열 두 봉에 첩첩이 싸인 안개
      半露尖峰紫翠堆 반쯤 드러난 봉우리는 붉고도 푸르러라.
      惱却襄王孤枕夢 이 몸의 외로운 꿈 수고롭게 하지 마오
      肯爲雲雨下陽臺 구름 되고 비가 되어 양대(陽臺)에서 만나보세.
      相如欲挑卓文君 사마상여 본받아서 탁문군 꾀어내려니
      多少情懷已十分 마음 속 품은 생각 벌써 흠뻑 깊어지네.
      紅粉牆頭桃李艶 담머리에 피어있는 요염한 저 도리(桃李)는
      隨風何處落 粉 바람에 흩어지며 고운 봄을 앗아가네
      好因緣耶惡因緣 예쁜 인연 되려는지 궂은 인연 되려는지
      空把愁腸日抵年 부질없는 이내 시름 하루가 삼추 같네
      二十八字媒已就 넘겨 보낸 시 한 수에 가약 이미 맺었나니
      藍橋何日遇神仙 남교(藍橋) 어느 날에 고운 님 만나질까.

  최랑이 깜짝 놀라 시녀 향아(香兒)를 시켜서 그것을 가져다 보니, 이생이 보낸 시였다. 최랑은 그 시를 계속 음미한 뒤 기뻐하며 종이 쪽지에 시 두어 글귀를 써서 담 밖으로 던져 주었다.

      님이시여 의심 마오 황혼 가약 정합시다.

  이생은 그 시 중의 언약과 같이 날이 어두워지자 최랑의 집을 찾아갔다.
  복숭아꽃 가지 하나가 갑자기 담 위로 휘어져 내려오며 어릿어릿 그림자가 나타났다. 이생이 가만히 살펴보니 그넷줄에다 대바구니를 매어서 늘어뜨렸는지라 이생은 곧 그 줄을 잡고 담을 넘어 들어갔다.
  때마침 동산에는 달이 떠오르고 꽃나무 가지의 그림자가 땅에 드리워졌다. 이생은 기쁘면서도 한편으론 그 동안의 비밀이 탄로 날까 두려워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그는 좌우를 둘러보았다.
  최랑은 꽃 떨기 속 깊숙히 파묻혀 앉아 향아와 함께 꽃을 꺾어다 머리 위에 꽂으며 이생을 보고는 방긋이 미소지으며 시 몇 구를 읊었다.

      桃李枝間花富貴 도리나무 얽힌 가지 꽃송이 탐스럽고
      鴛鴦枕上月嬋娟 원앙새 베개 위엔 달빛도 곱구나.
 
  이생이 뒤를 이어 읊었다.

      他時漏洩春消息 이 다음 어쩌다가 봄소식이 샌다면
      風雨無情亦可憐 무정한 비바람에 또한 가련하리라.

  최랑은 곧 얼굴은 바꾸며 말했다.
  "저는 당신과 함께 끝까지 부부가 되어 영원한 행복을 누리려 하였는데 당신은 어찌하여 갑자기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저는 비록 여자의 몸이지만 이 일에 대하여 마음이 태연한데 하물며 대장부의 의기로 그런 염려까지 하겠나이까? 나중에 만약 규중의 비밀이 누설되어 부모님께 꾸지람을 듣는다 하더라도 저 혼자 책임을 지겠습니다."
  그녀는 향아에게 방으로 가서 술과 과일을 가져오라고 했다. 향아는 명에 따라 가버렸다.
  온 집안이 고요하고 인기척이 없자 이생은 최랑에게 물었다.
  "이곳은 어딥니까?"
  "예, 뒷동산의 작은 다락 밑입니다. 저희 부모님께선 저를 유난히 귀여워 해주셔서, 따로 연못 가운데 이 집을 지어주시고, 봄이 되어 온갖 꽃들이 만발하면 향아와 함께 놀도록 하신 것입니다. 부모님이 계신 곳은 여기서 가깝지 않아 비록 웃음소리가 크더라도 잘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하고 이생에게 술 한 잔을 권하며 시 한 편을 읊는다.

      曲欄下壓芙蓉池 부용못 푸른 물은 난간에서 굽어보고
      池上花叢人共語 못가 꽃밭에서 정든 님들 속삭이네.
      香霧  春融融 안개는 부슬부슬 봄빛은 화창한데
      製出新詞歌白紵 새 가락 지어내어 백저사(白苧詞)를 불러 보세
      月轉花陰入   꽃 그늘엔 달빛 비쳐 털방석에 스며들고
      共挽長條落紅雨 긴 가지 잡아 보니 붉은 꽃비 쏟아지네.
      風擾淸香香襲衣 바람 속의 저 향기는 옷 속에 스미는데
      賈女初踏春陽舞 첫 봄 맞은 저 여인은 흥겹게 춤만 추네.
      羅衫輕拂海棠枝 비단 적삼 가벼이 해당화를 스쳤다가
      驚起花間宿鸚鵡 꽃 사이에 졸고 있던 앵무새만 깨웠어라.
 
  이생은 곧 서슴지 않고 화답하였다.

      誤入桃源花爛漫 잘못 찾은 선경에는 복숭아꽃 만발이네.
      多少情懷不能語 하 많은 이내 정회 어찌 다 속삭일꼬.
      翠 雙 金釵低 구름 같은 쪽진 머리 금비녀 낮게 꽂고
      楚楚春衫裁綠紵 시원한 모시 적삼 새로 지어 입었어라.
      東風初折  花 나란히 핀 꽃꼭지를 봄바람이 피워주니
      莫使繁枝戰風雨 저 많은 꽃가지를 비바람 부지 마오.
      飄飄仙袂影婆娑 나부끼는 선녀 소매 땅 위에 살랑살랑
      叢桂陰中素娥舞 계수나무 그늘 속엔 항아 아씨 춤을 추네.
      勝事未了愁必隨 좋은 일엔 언제나 시름이 따르나니
      莫製新詞敎鸚鵡 함부로 새 곡조를 앵무새에 가르치랴.

   주연이 끝나자 그녀는 이생에게 말했다.
  "오늘의 일은 분명히 작은 일이 아니오니, 당신은 저와 함께 100년의 기쁨으로 이룩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어느 날 이생은 최랑에게 말했다.
  "옛 성인의 말씀에 '어버이 계시오면 나가 놀더라도 반드시 일정한 방향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는데, 이제 내 어버이를 떠나온 지 벌써 사흘이 지났으니, 어버이께서 응당 문에 비겨 바라실 것이오니 어찌 인자(人子)의 도리라 하겠소."
  그녀는 곧 이생이 돌아가는 것을 응낙하였다.
  이런 일이 있고부터 이생은 저녁마다 그녀를 만났다. 어느 날 저녁, 이생의 아버지가 그에게 꾸지람을 내렸다.
  "네가 아침 일찍 집을 나가 저물어야 돌아옴은 옛 성인의 참된 말씀을 배우려 함이었는데, 이제는 황혼에 나가서 새벽에야 돌아오니 이게 어찌 된 일이냐? 분명 못된 아이들의 행실을 배워 남의 집 담장을 뛰어넘어 다니는 것이지? 이런 일이 남의 눈에 띄면 남들은 모두 내가 자식을 엄하게 가르치지 못했다고 책망할 것이요, 또 그 처녀도 만일 양반집 규수라면 너 때문에 문호(門戶)를 더럽힐 것이니, 남의 집에 죄를 지음이 적지 않을 것이다. 어서 빨리 영남 농촌으로 내려가 일꾼을 데리고 농사일을 감독하거라. 그리고 내 명령이 있기 전에는 함부로 올라오지 말지어다."
  아버지는 그 다음날 바로 아들을 울주(蔚州)로 내려보냈다.
  최랑은 매일 저녁마다 화원에서 이생을 기다렸으나, 몇 개월이 지나도록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혹시 그가 병이 나지 않았나 하고 향아를 시켜서 가만히 이생의 이웃사람에게 물어보니 이웃사람이 대답했다.
  "어머나! 이 도령은 그 아버지께 꾸지람을 듣고 영남 농촌으로 내려간 지 벌써 여러 달이 되었다오."
  이 소식을 들은 최랑은 어이가 없어 침상 위에 쓰러져서는 일어나질 못하였다. 그러고는 음식도 안 먹고 말조차 하지 않아 얼굴이 점점 초라해졌다.
  그녀의 부모는 놀라서 병의 증세를 물었으나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하루는 우연히 옆에 있는 대바구니를 들추다 딸이 이생과 함께 주고받은 시를 보고는 그제야 무릎을 치면서 말했다.
  "아아, 잘못하였으면 귀중한 딸을 잃을 뻔했구나,"
  그녀의 부모는 곧 딸에게 물었다.
  "도대체 이생이란 사람이 누구냐? 다 털어놓고 이야기 해보거라."
  일이 여기에 이르자 최랑은 더 이상 숨기지 못하고 목소리를 간신히 내어 부모님께 솔직히 고백하였다.
  "은덕이 깊으신 아버님 어머님께 어찌 숨기겠습니까? 다름이 아니오라 남녀간의 애정은 인간으로서는 소홀히 여기지 못할 일입니다. 그러므로 옛글에도 이에 대한 찬미나 우려의 말씀이 한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재가 연약한 몸으로 나중 일을 생각지 않고 이런 과오를 범하여 방탕한 행실이 더욱 나타나 남들의 웃음을 사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죄가 크고 수치스러움이 어버이께 미칠 것이오나, 이생과 헤어진 후로 원한이 쌓여 쓰러진 연약한 몸이 맥없이 홀로 있으니, 생각은 날이 갈수록 더욱 나고 병세는 점차 위중하여서 쓰러질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하오니 부모님께서 제 소원을 이루어 주신다면 남은 목숨을 보전할 것이옵고, 그렇지 않으면 비록 죽어서라도 지하에서 이생을 따르기로 맹세하고 다른 문정(門庭)에는 오르지 않겠나이다."
  그녀의 부모는 이미 그 뜻을 짐작하고 다시는 병의 증세도 묻지 않고 마음을 달래어 안정시키고는, 중매의 예를 갖추어 이씨에게 보내었다.
  "비록 우리 아이가 나이가 어리고 바람이 났다 하여도 학문에 정통하고 얼굴이 유다르니 장차 대과에 급제해서 세상에 이름을 알릴 것이니 함부로 혼사를 정하지 않겠소."
  중매인은 곧 돌아와 이 말을 최씨에게 전하였다. 최씨는 다시 중매인을 이씨에게 보내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귀댁의 도령은 재화(才華)가 뛰어나다 하니, 비록 지금 몹시 곤궁할지라도 장래엔 반드시 현달할지니, 빨리 만복의 날을 정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예, 나도 어려서부터 학문을 연구했는데 나이가 들어도 업을 이루지 못하여 노비들은 흩어지고 친척들도 돌봐주지 않아 삶이 곤란 하온데, 귀족 댁에서 무엇을 보고서 가난한 선비를 취하겠소. 아마도 일을 벌이기를 좋아하는 이가 나의 문벌을 과장되게 소개하여 귀댁을 속이려는 것이 아니겠소?"
  중매인이 할 수 없이 다시 돌아와 최씨에게 알리자, 최씨는 또 그를 이씨에게 보내었다.
  "모든 예물과 의장(衣裝)은 전부 저희 집에서 담당할 것이오니, 다만 좋은 날을 택해 화촉의 예를 치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씨는 최씨의 간절한 요청에 마음을 돌려 곧 사람을 울주에 보내 아들을 데려오게 하였다.
  이 희보(喜報)를 접한 이생은 기쁜 마음을 억누르지 못하여 시 수를 지어 읊었다.

      破鏡重圓會有時 깨진 거울 합쳐지니 이것 또한 인연이네
      天津烏鵲助佳期 은하의 오작(烏鵲)들도 이 가약을 돕겠네.
      從今月老纏繩去 이제부터 월로(月老)는 붉은 실 맺어주니
      莫向東風怨子規 봄바람 부는 저녁 두견새 원망 마오.
 
  오랫동안 이생을 그리워하던 최랑은 그가 이 시를 지었다는 소리를 듣고는 병이 점점 나아 시 한 수를 지어 읊었다.

      惡因緣是好因緣 아아 나쁜 인연이 좋은 인연 되었으니
      盟語終須到底圓 그 옛날 굳은 맹세 마침내 이뤄졌네.
      共輓鹿車何日是 어느 때 님과 함께 작은 수레 끌고 갈꼬.
      人扶起理花鈿 아이야 날 일으켜라 꽃비녀를 매만지리.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길일을 잡고 혼례를 치렀다. 이로부터 이 부부는 서로 사랑과 공경을 지켜, 비록 옛날의 양홍과 맹광이라도 그들의 절개를 따를 수 없었다.
  그 다음 해에 이생은 대과를 거쳐 높은 벼슬에 올라 이름을 세상에 날렸다.
  이윽고 신축년(辛丑年)에 홍건적(紅巾賊)이 서울을 노략하자 상감께서 복주(福州)로 옮겨가셨다. 놈들이 건물은 파괴하고 인축(人畜)을 전멸시키매 그들의 가족과 친척들이 동서로 분산되었다.
  이때 이생은 가족과 함께 산골에 숨어 있었는데, 도적이 칼을 들고 뒤를 쫓아오는지라 그는 겨우 도망하여 목숨을 구했으나, 최랑은 도적에게 잡혀 정조를 빼앗길 처지에 이르자 크게 노하여 소리질렀다.
  "이 창귀( 鬼)놈아! 나를 먹으려고 하느냐. 내가 차라리 죽어서 시랑(豺狼)의 밥이 될지언정 어찌 돼지 같은 놈에게 이 몸을 주겠느냐."
  놈은 종말에 그녀를 무참하게 죽여버렸다.
  이생은 온 들판을 헤매고 다니다가 도적들이 이미 없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을 찾아갔다. 자기의 집은 이미 병화(兵火)로 인해 오유(烏有)로 돌아갔다. 최랑의 집에 이르니 쓸쓸하고 그 주위에 쥐들이 우글거리고 새들의 울음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이생은 슬픈 마음을 견디지 못하여 작은 다락 위에 올라가 눈물을 삼키며 한숨을 깊이 쉬고는 날이 저물 때까지 우두커니 앉아 옛 일을 회고하니 모든 게 꿈만 같았다.
  밤중이 되어 달빛이 들보를 비추자, 낭하에서 발걸음 소리가 점점 가깝게 들려와 깜짝 놀라 보니, 옛날의 최랑이었다.
  이생은 그녀가 죽은 것을 알고 있었으나, 워낙 유다른 사랑이라 의아하게 생각지 않고 물었다.
  "당신은 어디로 피난하여 생명을 보전하였소?"
  최랑은 그의 손을 잡고 통곡하며 말했다.
  "저는 원래 귀족의 딸로서 어릴 때에 모훈(母訓)을 받아 수놓는 일과 침선(針線)에 열심이었고, 시서(詩書)와 예의를 배워 단지 규중의 예법만 알고 그 외의 다른 일은 잘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당신이 복숭아 핀 담 위를 엿보셨을 때 저는 스스로 벽해(碧海)의 구슬을 드려 꽃 앞에서 한번 웃고 평생의 가약을 맺었습니다. 또한 깊은 휘장 속에서 거듭 만날 때마다 정이 100년을 넘쳤습니다. 여기까지 말을 하고 나니 슬프고 부끄러운 마음 금할 길이 없군요. 장차 백년해로의 낙을 누리려 하였는데 뜻밖의 횡액(橫厄)을 만나, 끝까지 놈에게 정조를 잃지는 않았으나, 육체는 진훍탕에서 찢겼사옵니다. 절개는 중하고 목숨은 가벼워 해골을 들판에 던졌으나 혼백을 의탁할 곳이 없었습니다. 가만히 옛일을 생각하면 원통한들 어찌하겠습니까? 당신과 그 날 깊은 골짜기에서 하직한 뒤 저는 속절없이 짝 잃은 새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제 봄빛이 깊은 골짜기에 돌아와 저의 환신(幻身)은 이승에 다시 태어나서 남은 인연을 맺어 옛날의 굳은 맹세를 결코 헛되게 하지 않으려 하는데 당신 생각은 어떻습니까?"
  이생은 매우 기뻐하며 감사히 여겨 대답했다.
  "이것이 원래 나의 소원이오."
  둘은 재미있게 말을 주고받았다. 이생은 또 물었다.
  "그래, 모든 가산은 어떻게 되었소?"
  "예,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어떤 골짜기에다 묻어두었습니다."
  "그럼 우리 두 분 어버이의 유골은 어찌 되었소?"
  "하는 수 없이 어떤 곳에 그냥 버려두었습니다."
  두 사람은 이야기를 마친 뒤 함께 취침하여 즐기니, 기쁜 정은 옛날과 조금도 다를 바 없었다.
  그 이튿날 그들은 옛날 함께 살았던 곳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금은 재보를 찾고, 또한 그것을 팔아 부모의 유골을 거두어 오관산(五冠山) 기슭에 합장하였다.
  장례를 치른 뒤 이생이 벼슬을 하지 않고 최랑과 함께 살림을 차리니, 뿔뿔이 흩어졌던 노복도 점점 모여들었다.
  이생은 그 이후로 인간의 모든 일을 다 잊어버리고, 심지어는 친척 빈객의 방문과 길흉대사를 모두 제쳐놓고, 문을 굳게 닫고 최랑과 함께 시구를 창수(唱酬)하며 몇 해 동안 금수를 누렸다.
  어느 날 저녁에 최랑은 이렇게 말하였다.
  "세상일이 하도 덧없어 세 번째의 가약도 이제 머지않아 끝나게 되오니, 한없는 이 슬픔 또 어찌하오리까?"
  "그게 무슨 말이오?"
  "저승길은 피할 수 없는 길입니다. 저와 당신은 천연(天緣)이 정해져 있고 또한 전생에 아무런 죄악도 없으므로 이 몸이 잠깐 당신과 만나게 되었사온데, 어찌 인간 세상에 오래 머물러 산 사람을 유혹할 수 있겠습니까?"
  이야기가 끝나자 그녀는 향아를 시켜서 술과 과일을 드리고, 옥루춘(玉樓春) 한 가락을 불러 이생에게 술을 권하였다.
 
      干戈滿目交揮處 도적떼 밀려와서 처참한 싸움터에
      玉碎花飛鴛失侶 몰죽음 당하니 원앙도 짝 잃었네.
      殘骸狼藉竟誰埋 여기저기 흩어진 해골 그 누가 묻어주리
      血汚遊魂無與語 피투성이 그 유혼(遊魂)은 하소연도 할 곳 없네
      高唐一下巫山女 슬프다 이내 몸은 무산선녀 될 수 없고
      破鏡重分心慘楚 깨진 거울 갈라지니 마음만 쓰라리네.
      從玆一別兩茫茫 이로부터 작별하면 둘이 모두 아득하네
      天上人間音信阻 저승과 이승 사이 소식조차 막히리라.

  노래부르는 동안 눈물이 흘러내려 곡조를 거의 이루지 못하였다. 이생도 슬픔을 걷잡지 못하며 말했다.
  "내가 차라리 당신과 함께 지하로 돌아갈지언정 어찌 무료하게 여생을 홀로 보전하겠소? 이마적 난리를 치른 뒤 친척들과 노복이 흩어지고 돌아가신 부모님의 유골이 들판에 버려졌을 때 당신이 아니었다면 누가 가르쳐 주었겠소? 옛 성인의 말씀에 '어버이 계실 적에 예로 섬길 것이며 돌아가신 후에도 예로 장사할 것이라.'하였는데, 이제 당신이 모두 실천하였으니 내 감사의 뜻을 아끼지 않으리다. 아무쪼록 당신은 인간 세상에 오래 살아 100년의 행복을 누린 뒤에 나와 같이 진토가 되는 것이 어떻겠소?"
  "당신의 명수는 아직 많이 남았고 저는 이미 귀신의 명부(名簿)에 실렸사오니, 만약 굳이 인간의 미련을 가지면 명부(冥府)의 법령에 위반되어 저에게 죄과가 미칠 뿐만 아니라 당신에게도 누가 미칠까 염려됩니다. 단지 제 해골이 아직 그곳에 흩어져 있사오니, 은혜를 거듭 베푸시어 사체를 거두어 주시면 감사하겠나이다."
  말을 마치자 그녀의 육체는 점점 사라져 종적을 감추어 버렸다.
  이생은 그녀의 말대로 해골을 거두어 부모의 묘 옆에다 장사지낸 후 병이 나서 몇 개월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 이야기를 들은 모든 이들은 감탄하며 그들의 아름다운 절개를 칭찬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