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글] 이해인 님의 글들..

 
 
오늘은 가을 숲의 빈 벤치에 앉아 새 소리를 들으며 흰구름을 바라봅니다.
한여름의 뜨거운 불볕처럼 타올랐던 나의 마음을
서늘한 바람에 식히며 앉아 있을 수 있는 이 정갈한
시간들을 감사합니다.....

 
대추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린 우리집 앞마당.
대추나무 꼬대기에서 몇 마리의 참새가 우는 명랑한 아침기도.
바람이 불어와도 흩어지지 않는 새들의 고운 음색.
나도 그 소리에 맞추어 즐겁게 노래했습니다.
당신을 기억하며 -

 
한 포기의 난을 정성껏 키우듯이 언제나 정성스런 눈길로
당신을 바라보면 그것이 곧 기도이지요?
물만 마시고도 꽃대와 잎새를 싱싱하게 피워 올리는 한 포기의난과도 같이,
나 또한 매일 매일 당신이 사랑의 분무기로 뿜어 주시는 물을,
생명의 물을 받아 마신다면 그것으로 넉넉하지요?

 
기도서 책갈피를 넘기다가 발견한 마른 분꽃 잎들.
작년에 끼워 둔 것이지만 아직도 선연한 빛깔의 붉고 노란 꽃잎들.
분꽃잎을 보면 잊었던 시어들이 생각납니다.
당신이 정답게 내 이름을 불렀던 시골집 앞마당, 그 추억의 꽃밭도 떠오릅니다.

 
급히 할 일도 접어두고 어디든지 여행을 떠나고 싶은 가을.
정든 집을 떠나 객지에서 바라보는 나의 모습, 당신의 모습,이웃의모습.
떠나서야 모두가 더 새롭고 아름답게 보일 것만 같은 그런 마음.
그러나 멀리 떠나지 않고서도 오늘을 더 알뜰히 사랑하며
살게 해 주시길.....

 
"네가 보고 싶었어"라고 말하는 이의 눈 속에 출렁이는 그림한점,샤갈의<푸른장미>.
"너를 사랑해"라고 말하는 이의 목소리 속에 조용히 흔들리는 선율,.
내게 이런 모든 것을 느끼도록 해 주신 당신의 크신 얼굴이 더 크게 살아오는 가을.
루오의 그림마다에서 당신의 커다란 눈들이 나를 부릅니다.

 
오늘은 길을 떠나는 친구와 한 잔의 레몬차를 나누었습니다.
이별의 서운함은 침묵의 향기로 차안에 녹아 내리고 우리는 그저
조용히 바라봄으로써 서로의 평화를 빌어 주고 있었습니다.
정든 벗을 떠나 보낼 때는 언제나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헤어질 때면 더욱 커 보이는 그의 얼굴. 손 흔들때면 더욱 작아 보이는 나의 얼굴.

 
새벽에 성당 가는 길엔 푸른 색 나팔꽃 한 송이와 꼭 마주치게
됩니다. 그 꽃이 나를 바라보듯이 내가 그 꽃을 바라보듯이 그렇게
유순하고 사심없는 마음으로 매일을 살게 하여 주십시요.

 
귀뚜라미 노래소리에 깊어가는 가을밤.
내 피곤한 육신을 맨땅에 눕히듯이 작은 나무 침대위에 눕히면,
오랜만에 달고 싱싱한 사탕수수 같은 나의 꿈과 잠.
꿈에도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과 긴 여행을 합니다.
꿈꾸는 것조차도 당신 안에선 가장 아름다운 기도입니다.

 
보름달 속에 비치는 당신의 빛나는 모습.
달처럼 차고 또 기우는 우리의 삶은 얼마나 아름다운 것입니까.
달빛에게 세례받은 하얀 박꽃처럼 순결한 마음으로 당신을 기억하며
살고 싶습니다. 나 또한 당신의 넓은 하늘에서 하나의 달이 되어 뜰 때까지…..

 
가을엔 가장 작은 들꽃의 웃음소리까지도 들을수 있습니다.
남 몰래 앓고 있는 내 이웃의 작은 아픔까지도 깊이 이해하며
그를 위한 나의 눈물이 기도가 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15년 전부터 내가 아껴 쓰던 열두 빛깔의 색연필을 깎아 이글을씁니다.
이 연필들이 나의 손에 길들어져 조금씩 닳아 가듯이
나 또한 당신에게 길들어지며, 담백한 마음으로 매일을 살고싶습니다

 
가을엔 내가 잠을 자는 시간조차 아까운 생각이 듭니다.
"좀더 참을 걸 그랬지, 유순할 걸 그랬지."  남을 언짢게
만든 사소한 잘못들도 더 깊이 뉘우치면서 촛불을 켜고 깨어
있어야만, 꼭 그래야만 될 것 같은 가을밤.
당신 안에 만남을 이룬 이들의 착한 얼굴들을 착한 마음으로 그려 봅니다.

 
가을 길에 줄지어 선 코스모스처럼 내 마음 길에 수없이
한들대는 시심의 꽃잎들.
'따지 말고 그냥 두면 더한 아름다움일 것을'
이러한 생각이 시 쓰는 나를 괴롭힐 때가 있슴을 헤아려 주십시요.

 
가을엔 지는 노을을 바라보듯이 그렇게 조심스런 눈빛으로 매일을 살아 갑니다.
당신과의 만남은 저 노을처럼 짧게 스쳐 가는 황홀한 순간과,
보다 더 긴 안타까움의 순간들을 남겨 놓고 떠납니다.
그러나 오십시오.
아름다운 당신은 오늘도 저 노을 처럼 오십시오.